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며칠 동안 여독을 푸는 데 쓰이는 시간을 가리켜 종종 여진을 앓는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뒤늦게 밀려오는 지진처럼, 한동안 낯선 땅을 밟고 돌아오면 몸은 시차로 인해 또 다른 몸을 배회하기 시작하는데, 자신의 눈이 잠시 그 몸을 다 돌아보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그 여독을 감당하기 위해 시도했던 문장은 어떤 무렵을 향해 울렁거리게 마련이다. 내게는 그런 무렵들이 시로 다가왔다고 그동안 몇권의 시집으로 충분히 ‘시차’에 대해선 엄살을 떤 것 같고, 그 시차의 이름들을 지어주며 보내는 시간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라는 말로 내 여행의 목록은 다시 채워지고 있다. (내 생각에 사람들 대부분은 일생을 자신의 몸으로 빚어내는 시차들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보내고 있으므로) 하나의 여행기란 언제나 내면의 추상이 가득 담긴 풍경화에 가깝거나 내면의 풍경이 점점 어떤 추상화에 가까워지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는 새로운 여장을 또 꾸릴 것이다.
서럽다
한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며칠 전 상수동 근처의 카페에 앉아 오전부터 일을 보고 있는데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눈발이었다. 춘삼월에 눈이라니…. 이런 눈은 초겨울 파릇파릇한 생눈이라기보다는 거의 꺼져가는 불빛처럼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가늠하기 힘든 질량으로 허공을 차지하고 있는, 가물가물한 눈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문득 재개발 구역의 집 한채가 아까부터 포클레인에 헐리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집이 헐리고 있는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서러운 구석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누군가 밤마다 그곳에 누웠고 잠들었을 상상이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 집은 수치심으로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치심이란 혼자 그것을 감당해야 할 때 더없이 크게 마련인데 집은 자기 혼자 그것을 감당하느라 거의 울먹거리듯이 놀라면서 자신의 공간들을 거칠게 들키고 있었다. 문장의 은밀함이 밖으로 드러날 때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은밀한 형식을 필요로 하듯이 은밀한 문장을 지어보겠다는데 그 형식이 은밀하지 못할 때 문장이 수치를 느끼듯이, 집은 자신이 지어졌던 방식처럼 무너지는 방식의 형식을 찾지 못하면 서럽게 울게 된다. 슬픔에 가득 차 있을 때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울먹거리는 아이처럼.
인간이 공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인간이 하나의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라는 어느 인류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기독교적 ‘믿음’의 영역에서 보자면 인간은 공간을 비우고 떠나면서 자신의 시간을 새롭게 채우기 시작한다. 때로 공간은 인간에게 더없이 시간보다 인간적인 것이 되고 사람들은 자신이 머물렀던, 서성거렸던 공간으로부터 어떤 기억을 불러온다. 그 특정한 공간이 데리고 있던 시간을 불러오는 것이 기억이라고 한다면, 기억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시간의 평행으로부터 감추려고 하는 특정한 공간에 예민하고 다정한 우리의 상상력이 그곳에 닿아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누웠다가 간 자리들이, 그 무구한 주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듯이 우리의 눈이 기억을 타고 자신이 살았던 그곳으로 돌아갔는데 누울 곳을 찾지 못해 서성거릴 때 갑자기 참혹해지는 것처럼, 공간은 시간보다 쉽게 들키고 시간보다 쉽게 수치심에 빠지기 때문이다.
집에 누워 잠들던 사람의 눈을 마지막으로 상상하며 집은 자신도 눈을 감을 것이다. 포클레인은 외벽을 방쪽으로 힘껏 밀어붙여 집 전체에 공포를 주기 시작하더니 금이 간 부분부터 뒤집기 시작했다. 포클레인의 삽날에 벽의 틈들이 이지러지며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집 안의 주인공들과 함께 오랜 기간 이곳에 살면서 벽으로 조금씩 들어가 살던 틈들이 자신의 살림을 들키는 순간일 것이다. 어쩌면 저 틈들은 벽과 방을 지탱해주던 또 다른 힘들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살고 싶었다’는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인간에게 틈은 그 설명하기 힘든 결속을 감추고 있을 때 오히려 견딜 만한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눈은 그 틈에도 쌓이고 있었다.
거미의 눈
이윽고 포클레인은 조각난 곁방과 안방을 한쪽에 쌓기 시작했다. 방들은 작은 돌무덤처럼 쌓여갔다. 천장은 그 옆에 쌓였다. 눈은 헐린 방 더미 위로 끊임없이 내렸다. 방에 숨어 살던 먼지들이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눈 곁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뜯긴 방문이 포클레인의 집게에 걸려 축 늘어져 있다. 일을 진행하는 사람들의 침묵만큼이나 눈은 소리없이 내렸다. 눈이 침묵을 데리고 온 것인지 침묵이 그 눈 위를 덮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내쪽에선 기계음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쪽에서 저 방들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눈의 침묵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창문을 통해 나는 눈이 내리고 허물어져가는 한 집의 풍경을 구경했지만 어떤 침묵의 풍경 하나를 목격한 듯하다. 아주 구체적인 풍경이었지만 어떤 불가해한 침묵으로 인해 추상이 되어버린 실체처럼, 오랜 여행을 마친 집 한채의 풍경이 이제는 알아보지 못할 추상이 되어가는 시차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그건 아이의 키를 표시하기 위해 표시해두었던 벽지의 보풀거리는 눈금을 숨기고 있는 어느 눈의 시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잠시 머물렀던 방을 다시 한번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에 짐을 처음 들일 때 바닥을 치우고 걸레질을 하며 그 방의 주인들 것이었을 깨진 손톱, 발톱 조각들을 쓸어 담은 적이 있다. 그 방에 누워 나는 밤마다 시를 짓곤 했는데 캄캄하다는 발음이 자주 떠올랐고 습기 때문에 내가 지닌 오래되고 누런 책들 사이에서 손톱보다 작은 희미한 벌레들이 스륵스륵 기어나오는 것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어느 날 초저녁 불을 끈 채 누워서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잠시 흐느낀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내 방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갔는데 그 사람이 방의 전 주인인지 누구인지 내쪽에서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저처럼 내가 살던 방을 떠난 뒤 한번 이곳을 찾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곤 하는 것이었다. 유령처럼 자신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의 편에서 나는 그날 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다 간 밤>이라는 시 한편을 썼다. 거미는 한번 떠난 방을 다시 찾지 않는다고 한다. 일생 동안 무수히 많은 집을 짓지만 벼린 집을 향해 제 서러움을 몰고 다시 찾지 않는 것이다. 저 헐리고 있는 집의 구석에서 희끗희끗한 눈을 머리로 맞으며 제집을 떠날 채비를 하는 거미의 눈을 상상하는 일은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