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순간들>
2008년 감독 얀 트로엘 상영시간 106분 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 음성포맷 DD 5.1, 2.0 스웨덴어 & 핀란드어 자막 영어 출시사 아이콘(영국)
화질 ★★★☆ 음질 ★★★ 부록 ★★★☆
2008년, 나란히 77살을 맞은 얀 트로엘과 야마다 요지가 신작을 발표했는데, 구만리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두 영화 <영원한 순간들>과 <엄마>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약속이나 한 듯이 두 노장은 ‘어머니’라는 존재로 눈을 돌렸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감독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의 가족으로부터 나왔으며, 두 주인공은 공히 20세기 초·중반의 험난한 시기에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살았다. 진지하고 우아한 필름영화의 가치를 일깨워준 두 영화는, 그러나 인물에 대한 접근방식이 서로 다르다. 어머니를 향한 애정 어린 눈길을 내내 거두지 않는 <엄마>가 관객의 눈물을 쏙 뽑는 드라마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상에 비중을 둔 <영원한 순간들>은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엄마>의 그녀에게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던 것과 달리 <영원한 순간들>의 그녀에겐 세상을 보는 두 번째 눈, ‘카메라’가 있었다.
복권이 당첨돼 카메라를 받은 마리아는 복권을 사준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 뒤로 오랫동안 그녀는 사진을 꿈꾼 적이 없다. 술주정뱅이에다 폭력을 곧잘 휘두르는 남편과 일곱명의 어린 자식들로 인해 그녀는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고, 궁핍한 생활은 그녀를 끊임없는 노동으로 몰아넣었다. 어느 날, 장 깊숙이 묻어둔 카메라와 재회한 마리아는 그걸 생활비로 바꾸려고 사진관을 찾는데, 스튜디오 운영자인 페데르센이 오히려 사진을 찍어보라고 권하면서 그녀의 생활은 새 빛을 얻는다. 틈틈이 가족의 얼굴과 이웃 하층민의 삶을 영원의 순간으로 기록하며 그녀는 점점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한다. 극중 화자인 큰딸은 왜 어머니가 끝내 아버지를 버리지 않고 가족을 지켰는지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마리아가 품고 있던 생각은 영화에서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대개의 옛 여성들처럼 마리아는 부닥치는 매 순간 행동으로 풀어나가느라 바빴을지 모른다. 20세기 초반의 스웨덴에선 이념 대결이 벌어지고 사회 체제가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었지만, 그녀는 가족 바깥으로 눈길을 돌릴 겨를조차 없었고, 카메라를 만질 때마다 행복을 느끼면서도 결국 작가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예술가의 길을 가로막는 현실을 원망하기는커녕 잠시 사진에 빠져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걸 자책하는 여자였다. 부모 세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애착을 느낀다는 트로엘은 마리아의 얼굴에서 숭고한 진실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거부해야 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이겨내야 했고, 아이들이 꿈을 잃지 않도록 도와야 했던 마리아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으며, 극중 인물 페데르센에 자신을 투영한 감독은 기억에서 사라진 한 세기 전의 인물을 영화라는 또 하나의 예술 안으로 인도한다.
트로엘은 거친 입자로 시대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슈퍼16mm로 <영원한 순간들>을 찍었는데, 세피아 톤으로 채색된 고즈넉한 이미지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인터뷰에서 ‘필름의 마법’을 언급했던 트로엘은 관객에게 그 마법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트로엘의 대표작인 <이민자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영화의 미가 현실과 동떨어진 게 아니냐고 불평할 법하다. 마리아가 지닌 콘테사 카메라의 감광판에 빛이 필요했듯, 트로엘은 마리아가 비참한 현실 너머로 도달한 구원의 빛이 영화에 새겨지길 바란 것 같다. 브라운 색의 따뜻한 질감, 섬세하게 공을 들인 미장센은 노 감독이 인물에게 바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영국 발매 DVD는 (PAL 변환을 감안해) 110분 판본을 수록했다(부산영화제 상영 판본은 125분이었으며, 6월에 발매될 미국 크라이테리언 DVD에는 131분 판본이 담길 예정이다). 부록으로는 소박한 제작과정을 전달하는 ‘영화 뒷이야기’(28분)와 옛 사진을 엮은 ‘포토갤러리’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