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있는 죽음은 애도 가운데 희미해져간다. 그것은 삶의 시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설명을 거부하는 죽음은 점점 선연해진다. 거듭 되돌아와 이승을 교란한다. 논리로 가닿을 수 없는 장소에 생사를 가를 만한 위력이 존재한다는 징조는, 먼 숲속 괴물의 기척처럼 우리를 잠 못 들게 한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세경(신세경)과 지훈(최다니엘)의 사고사로 막을 내렸다. 비단 시트콤의 범주에서만 이변이라 불릴 일이 아니다. 기억하는 한 최근 TV 역사에서 여기 비견할 만한 예는 <발리에서 생긴 일> 정도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종영 이튿날은 독한 황사가 불어와 여운을 악화시켰다. 엉뚱한 연상이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의 마지막 흑백 정지화면을 보며, 나는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전 연장전에서 프랑스의 지단이 퇴장 가능성을 눈앞에 두고 이탈리아 수비수 마테라치를 머리로 들이받았던 경악스러운 순간을 떠올렸다. 파국을 번연히 바라보면서 그리로 기어코 걸음을 옮기게 하는 비이성적 충동이, 효율을 우선으로 운영되는 공식적 세계에 침범해 들어올 때의 전율이 거기 있었다.
자기 파괴적 충동은 제어되지 않았다
“그가 나를 보러 오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지체했더라면, 세경씨를 만났더라도 바래다주지 않았더라면….” 3년 뒤 에필로그 장면에서 정음이 말하는 가정처럼 김병욱 감독에게도 여러 가지 ‘만약’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방영 마지막 주에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최종회 대본의 상상력은 다른 곳으로 가지를 벋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촬영현장에서 세경의 고백에 진실을 자각하는 지훈의 모습이 연출자의 눈에 미학적으로 ‘옳아’ 보이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다른 지점에서 멈출 수 있었다. 심지어 촬영을 마친 연후에도 여전히 길은 열려 있었을 것이다. 교통사고를 보도하는 뉴스와 3년 뒤 에필로그 장면만 편집으로 붙이지만 않았더라도, <지붕 뚫고 하이킥!>은 아무도 화나게 하지 않은 채 갈채 속에 모두가 납득할 만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김병욱 감독은 ‘자기 파괴적’ 충동을 제어하지 않았다.
눈을 돌려도 소용없다. 세경과 지훈의 죽음은 일어나서는 안되었을 그 자리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도대체 왜?”라는 힐문은 김병욱 작가/감독을 향한다. 3월19일 종영 직후 일부 시청자가 토로한 분노는 타당해 보인다. 그들은 비단 매력적인 두 주인공이 희생되어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시청자는 드라마가 보여주지 않은 부분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비극적 사고가 초래했을 법한 현실적인 후일담은 끔찍하다. 따뜻한 추억을 안고 호의적으로 헤어졌던 순재네 식구들과 세경의 가족은 비탄과 원망으로 갈가리 찢어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의 결론은 지난 6개월 동안 시청자가 정을 붙이고 몰두해온 세계를 우그러뜨려버렸다. 이제 작품의 재방송을 티없이 웃으며 보기란 틀렸다. 말하자면 126회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결말인 동시에 ‘종말’이었다.
시트콤이 불행한 엔딩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차피 해피엔딩의 관습은 김병욱 감독의 전작과도 관계가 없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거침없이 하이킥!>의 엔딩들도 시트콤 장르의 지정된 정서적 코드와 안온하게 밀폐된 시간을 벗어나, 우수에 찬 시선으로 누군가 쇠약해지고 사라진 뒤에도 계속되는 삶을 내다보았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포용할 수 없었던 극중 세계의 피안에 눈길을 던짐으로써 시트콤의 숙명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지붕 뚫고 하이킥!>의 피날레는 그것을 폭력적으로 넘어선 자기부정이다. 비단 주인공에 해당하는 캐릭터가 죽고 비탄의 음정으로 이야기가 끝나서가 아니다. 슬픔은 종종 기쁨보다도 유능한 통합과 화해의 장치다. 예컨대 온갖 풍상을 견딘 가련한 여주인공이 침상에서 죽어갈 때 그 앞에 다른 인물들이 모여 진실을 깨닫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서로를 부둥켜안는 숱한 결말을 우리는 안락하게 지켜보아왔다. 하지만 세경의 진실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전달되었고 그 인물은 비밀을 끌어안은 채 같이 사라져버렸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끝에서 김병욱 감독의 선택이 자아낸 정서는 슬픔이 아닌 불안과 공포다. 우리는 유난히 거친 마지막 장면의 연출- 빗소리와 대사를 잡아먹을 정도의 소음과 차체의 요동, 시야를 훼방놓는 와이퍼의 움직임이 주었던 감각적 위협을 기억해야 한다. 극중 인물과 시청자가 거한 휘장을 밖으로부터 찢어버리려는 위협.
충격적 엔딩은 많은 의심을 불러왔다. 지금 나는 결론을 갖지 못한 채, 그저 그 다양한 의혹들이 틀렸음을 말하고 싶다. 이 결말은 반전애호증인가? 아니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커리어를 바쳐 예증한 대로 반전이란 대개 텍스트 전체를 별안간 다른 앵글에서 바라보게 하여 새롭게 통일된 형상을 드러내는 장치다. 반면 <지붕 뚫고 하이킥!>의 뒤집기는 작품 전체의 형상을 해체해버렸다. 세경과 지훈의 비극적 사고는 여태 제시된 갈등을 자동적으로 해결하는 기계신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물 앞에 놓인 어려운 과제에서 도망치게 해주는 회피의 퇴로도 아니다. 또한, 서사를 외부에서 매듭짓는 어떤 교훈의 상징도 은유도 아니다. 두 인물의 죽음은 정반합의 절차를 거스르고 상식적인 종장다운 종합을 거부하며 작품 전체의 대의명분을 배반한다. 그러니까 이 결말은 전혀 기능적이지 않으며 어떤 쾌락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이상하지만, 충격적 엔딩을 두고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말 중에 가장 적절한 묘사는 “미쳤다”라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얼룩, 불안
우리가 목격한 것은 사실 일종의 주술이다. 125회 내내 가난과 책임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짊어지고 홀로 걸었던 소녀, 사람들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뭐 필요하신 거 있어요?”라고 응대하던 소녀, 결코 자신의 필요를 발설하지 않았던 소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자(“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그것은 곧장 강력한 주문이 되었다. 그래서 연출자의 상식적 절제와 시리즈를 집어삼키고 서사의 관례를 찢어버리고 공중파 TV의 우주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결말의 유일한 의미가 있다면, 우리가 시리즈를 통해 지금까지 지켜본 희로애락에 두었던 모든 의미의 박탈이다. 혹은, 희귀하고 완전한 생의 순간에서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작가의 욕망이 그 모든 의미에 우선한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모험이나 실험이라기보다 창작자가 아무리 애써도 표현하고 싶은 바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던 하나의 양식을 향해, 그동안 자신이 공들여 제공한 웃음과 위안과 눈물을 차마 견딜 수 없다는 투로 내지른 최후의 몸짓처럼 보인다. 극단적 피로와 열정에 휩싸인 그 몸짓은 우리의 기억에 어떤 얼룩을 남겼다. 쉽사리 지울 수 없는 진한 얼룩을.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은 서사의 구경꾼으로서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본 자의 불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