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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난 뒤] 10년 묵은 무대의 맛
심은하 2010-03-18

연극 <이(爾)> 일시: 3월21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출연: 김내하, 전수환, 오만석, 김호영, 이승훈, 정석용, 조희봉, 진경, 하지혜 문의: 1588-5212

10년이다. 그 사이 연극 <이(爾)>에는 새로운 이름표가 붙었다. 바로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 나 역시 영화를 본 뒤 원작의 호기심에 이끌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연극을 보았다. 당시에는 영화에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대극장 뒷좌석에 앉은 터라 배우들의 대사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탓이 컸음을 이번 공연에서 깨달았다. 그렇다고 영화에 대한 호감이 줄어든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연극 <이(爾)>가 지닌, 즉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원작의 고유함을 느꼈다고 할까.

영화에 비해 연극은 생생한 입체감이 있다. 영화가 대중적이라면 연극은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배우들의 대사에도 언어의 깊이와 느낌이 다르다. 여기에는 ‘10주년 기념공연’이란 부제에 드러나듯이 지난 10년간의 역사를 함께한 원년 배우들이 다시 합심한 공이 크다. 공길 역의 오만석에 장생은 이승훈, 연산은 김내하, 녹수는 진경이 맡았다.

영화와 연극을 비교 감상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연극 <이(爾)>는 연산과 공길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특히 영화에서처럼 마냥 곱기만 한 공길은 연극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민 광대의 신분으로 연산에게 이(爾)라는 호칭을 하사받은 공길이다. 연극 속 공길은 권력지향적인 인물로서 강한 인상을 보여준다. 영화를 이끌어간 장생의 비중이 연극에서는 많이 줄었다. 연극에서 연산은 태생적으로 그가 가진 심리적 상처에 뒤틀리고 비뚤어진 인간이다. 영화보다 조금 더 광기어린 인물로 그려진다.

총 2막으로 이루어진 연극 <이(爾)>의 1막은 연산과 공길, 녹수의 첨예한 사랑싸움과 암투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중간중간 성대모사, 재담, 음담패설 등으로 풍자하는 광대놀이가 극적 긴장감을 풀어주며 신명을 돋운다. 2막은 녹수가 공길의 필체를 본떠 역적 누명을 씌우고, 공길을 구하려는 장생의 애처로운 사랑이 극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처형당한 장생을 두고 공길은 연산을 향해 회한과 분노를 터트리고, 반정과 함께 끝내 목숨을 잃은 공길의 시신을 부여잡고 연산은 절규한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김내하와 이승훈이다. 이승훈은 영화 <왕의 남자>에도 출연했는데, 팔복이가 그다. 또 작지 않은 무대에서도 또렷한 대사 처리와 함께 연산의 암울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해준 김내하에게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연극 <이(爾)>의 또 다른 10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