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대로 영화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연작을 토대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임우성 감독은 해석하기 버거운 이 소설들을 가지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저력을 발휘했다.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꿈에서 본 어떤 장면의 암시를 통해 채식을 선언한다. 남편과 친정식구들은 이런 영혜의 변화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급기야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영혜는 심각한 정서적 충격에 빠진다. 이즈음,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의 작업에 영혜는 참여하게 되고 영화의 부제처럼 ‘나무가 되고 싶었던 여자’가 처한 폭력적 상황, 그를 둘러싼 인간 군상을 묘사한다.
잘 짜인 영상과 달리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는다. 난해한 상징이 얽혀 있는 영화의 얼개는 겨우 따라잡을까 말까였지만,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장면에 시선이 꽂힌다. 그녀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결국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얼마 전, <미녀들의 수다>에 나오는 독일 유학생이 그의 책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한국 비하냐 아니냐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비난)에 밀려 사람들이 주의 깊게 보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그 유학생이 겪었던 육식 강요의 한국 문화였다. 한국은 ‘노래를 못하면 아들을 못 나요 아 미운 사람~’을 넘어서는, 육식 못하는(또는 안 하는) 이들에 대한 집단적 조롱이 횡행하는 땅이라는 사실이다. 그이는 삼겹살집에서 채식주의자(아니, 이방인이자 여자)가 강권하는 고기 세례를 피하기 힘든 현실적 불편을 심각하게 호소했다. 성숙한 사회라면 그이의 이런 호소는 즉각 사회적 담론으로 옮겨져 논쟁이 있었어야 옳았다. 성적 소수자처럼, 식탁 소수자들의 소외도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채식주의자들은 불행히도 하루 한두번 다른 이들과의 식탁에서 ‘커밍아웃’을 반복해야 한다).
부끄럽지만 요리사인 나는 한번도 채식주의자 메뉴를 짜본 적이 없다. 한국에 채식주의자가 적어서라기보다는 식당에서 당당하게 전용 메뉴를 요구하기 어려운 사회적 억압 때문인 것 같다. 그네들은 조용히 ‘채소 샐러드요’라고 목소리를 낮춰 주문할 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채식주의자들이 먹는 다섯 코스짜리(심지어 유지방이 들어가지 않는 디저트를 포함해서) 정찬을 주문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푸아그라와 마블링 스코어 높은 등심 메뉴를 내놓는 요리사보다 멋지고 유니크한 채식주의자 메뉴를 선보이는 요리사가 미슐랭 별을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영혜가 처한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고기를 안 먹는다는 얘기를 마치 굴이나 새우 알레르기를 고지하듯 자연스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 <채식주의자>는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설정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채식 이야기조차 우리는 이렇게 그로테스크한 화법으로 해야 하는 것 같아 슬퍼지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