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사하자마자 만들어야 하는 이메일 계정 말이다. 늘 그렇듯이 pepsi로 정했다. 펩시는 고등학생 때의 별명이었다. 그 콜라 이름이 맞다. 콜라를 좋아해서 그렇게 불린 건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1997년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치른 3월 모의고사에서 50등을 했다(뒤에 축구부 한명 있었다). 뒷목 잡고 쓰러질 뻔했다.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공부의 신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밥만 먹고 공부만 했다. 그런데 4월 모의고사 하루 전날, 집 거실과 식당 사이에 있는 통유리에 부딪혀 쓰러졌다. 유리는 산산조각 났고, 목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죽는 줄 알았다. 펩시라는 별명은 여기서 생겼다. 펩시맨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펩시맨~!” 하는, 당시의 광고 기억나는가. 친구들이 그 광고에 빗대어 나를 그렇게 불렀다. 노렸던 시험은 당연히 못 쳤고, 한달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입원해본 사람은 병원에서의 하루가 얼마나 긴지 잘 알 것이다. 매일 지루해하던 나를 위해 어머니는 영화잡지 세권(<씨네21> <키노> <프리미어>)을 사오셨다. <씨네21>과의 첫 만남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몰라도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읽었다. 그러면서 퇴원할 때의 내 꿈은 영화감독으로 바뀌어 있었다(아직도 그때의 결정을 진심으로 후회한다).
이후, 내 삶은 늘 우연의 연속이었다. 영화연출을 전공한 뒤 곽경택 감독의 연출부 막내로 들어간 일, 막내 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장률 감독의 <경계> 연출부로 몽골에 가게 된 일, 엎어지기 직전에 <사랑>의 투자가 결정되어 조감독 경력을 추가할 수 있었던 일 등 약 6년 동안 충무로에서 겪었던 일 대부분이 우연처럼 갑자기 다가왔다. 물론 내 의지와 노력이 작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만큼 행운도 함께했다는 말이다. <씨네21>도 그렇다. 2년 전 객원기자 면접 볼 때, 당시 다니던 회사에 병원 간다고 거짓말하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객원기자는 물론이고, 지금 오픈칼럼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약 한달 전, 송년인사를 드리기 위해 박광수 감독님을 뵈러 영상원을 찾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감독님께서“어떤 기자가 되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한국영화산업에 도움이 되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거창하게 답은 했지만, 건방떤 것 같아 만족스럽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은지’, ‘내가 정말 기자가 되고 싶긴 한 건지’등을 나오면서 다시 고민했다. 결론이 바로 내려질 리가 없었다. 답은 이번에도 역시 우연처럼 소중하게 찾아온 <씨네21> 생활을 하면서 찾을 생각이다. 매일 회사 현관문 앞에서 ‘잘해야지’ 다짐하는데 늘 욕심만 앞서는 것 같다. 정말 눈물나게 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