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매년 초에 열리는 이 행사는 올해가 다섯 번째이며 늘 그렇듯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 <씨네21> 독자라면 잘 아시는 대로 서울아트시네마는 영화진흥위원회의 공모방침으로 올해 존립 자체에 위기를 맞았고 예년과 달리 2010년 친구들 영화제도 마냥 잔치로 즐길 수만은 없는 분위기다. 서울아트시네마의 1년 예산은 10억원가량이고 아트시네마에 들어가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운영비 지원액수는 3억원이 좀 넘는다. 운영비의 30%를 지원하면서 공모를 한다는 논리는 해괴하다. 이 점을 누차 지적했지만 공모절차는 강행됐다. 공모에 응한들 될지 안될지 여부가 불투명한 것은 둘째치고 서울에서 유일하게 시네마테크 역할을 하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이렇게 궁색하게 구성원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굴러간다는 것은 한때 영화강국 운운했던 한국영화계의 수치일 것이다. 김밥 따위로 대충 끼니를 때우며 근무하는 아트시네마 직원들의 형편을 가까이서 본 내 입장에서는 잘 먹고 잘살지는 못해도 존립근거마저 알량한 지원금으로 흔들어놓는 현재의 공공기관의 논리에 화가 난다.
존 포드의 영화를 극장에서 본 적은 있어?
2010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에서 조희문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단상에 올라가 다소 알 듯 모를 듯한 축사를 했다. DVD로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에 어둠컴컴한 극장에 모여 영화를 보는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다소 농담조로 말한 그는 객석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축사 후반부에 아트시네마를 지원하도록 힘쓰겠다는 의례적인 말로 무마했다. 그게 가벼운 말실수인지 의도된 발언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모로나 시네마테크 행사에 와서 할 수 있는 농담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심의 대형서점을 놔두고 공공 도서관은 왜 필요한 것이며 사람들이 미술화집을 보는 것에 성이 안 차 미술관 전시회를 찾는 이유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거칠게 말했지만 시네마테크에 모여드는 관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할 것이다. 나는 올해 존 포드의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추천했는데 주변에서 또 존 포드냐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존 포드에 대해 영화를 좀 보는 사람들은 대개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 세대의 경우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본 체험은 매우 드물 것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상영이 끝나고 열리는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나 역시 존 포드의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것은 손에 꼽을 만하다는 걸 새삼 알았다. 동시에 명색이 영화평론가이면서도 존 포드의 영화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 라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존 포드는 흔히 말하는 거장이지만 그의 영화의 위대함을 명쾌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숱한 감독들이 존 포드 영화의 간결성에 탄복하는 걸 보면서도 그 간결성이란 걸 몸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존 포드라는 개인이 성취한 간결한 스타일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개인적 긴장이 복합적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집단적 작업체제인 할리우드에서 평생 영화를 찍었다. 그는 각본을 쓰지 않았고 다른 작가의 대본을 받아서 작업했으며 주제를 스스로 선택하긴 했으나 그 선택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수뇌부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가능했다. 포드 영화의 독자성은 그런 한계 내에서 발휘된 것이기 때문에 훗날 작가주의자들의 존경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포드 영화의 결정인자들은 매우 복합적이어서 포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할리우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배경이 되는 아일랜드 웨일스 마을을 재현한 세트는 2차대전 발발로 규모를 축소한 것이라고 해도 할리우드의 물적 조건이 아니면 불가능한 제작조건을 짐작하게 한다.
신화로서의 과거와 비극으로서의 현실이 대비
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가치는 흔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인 것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영화의 복합성은 스타일의 간결성과는 거꾸로 그런 단언을 부정한다. 이를테면 그의 경력이 정점에 달했던 1939년에 만든 <젊은 날의 링컨>의 첫 장면에서 존 포드는 포드적 수사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명하게 보여준다. 링컨이 봄날 어느 숲속 강가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준 법률책을 읽고 있을 때 앤 루트리지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링컨의 미래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앤은 링컨에게 시골에 머물지 말고 바깥 사회로 나가 좋은 경력을 쌓는 남자가 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링컨이 읽는 세속의 법률책은 어머니가 준 책이고 링컨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신의 법과 마찬가지이다. 옳고 그른 것을 판가름하는 이 법의 의미는 링컨에게 가족, 전통, 자연과 연관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숲속 강가를 걸을 때 포드 영화에서는 드물게 카메라는 측면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두 사람은 울타리 너머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울타리는 링컨의 만만치 않은 미래의 장애물을 연상시키고 배경에는 또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장면이 바뀌면 링컨은 죽은 앤의 무덤에서 자신의 미래를 다짐하는데 이때 배경의 늦겨울에 흐르는 강물에는 부서진 얼음조각들이 둥둥 떠 있다. 이 장면은 포드의 영화에 부착돼 있는 전통의 중요성을 명확히 시각적으로 언급한다. 링컨의 미래의 길은 과거에의 밀착에서 나온다는 것, 앤과 어머니의 기억이라는 과거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전통은 살아 있는 것이고 발전하는 무엇으로 인식된다. 전통은 과거에 뿌리를 두며 새롭고 희망찬 미래로 밀어내는 무엇이다. 이 장면에서 앤은 죽었고 얼음은 깨졌지만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그녀의 무덤에는 봄꽃이 꽂혀 있다. 전통에 뿌리박은 미래는 늘 희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포드의 영화는 낙관적인 결말이 많지 않다. <젊은 날의 링컨>의 결말에서 변호사 링컨이 사건을 해결하고 길을 떠날 때 하늘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링컨의 모습에는 음울한 정조가 감돈다. 이를 두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자들은 링컨이 흡사 공포영화의 괴물같이 보인다고 썼다.
올해 친구들 영화제에 내가 추천한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19세기 아일랜드 탄광촌 공동체에 대한 감상적인 송가처럼 보이지만 결국 공동체는 부서지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공동체의 수장인 아버지는 위엄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표면적인 감상주의의 기저에 흐르는 비극적인 현실의 조각들은 신화로서의 과거와 비극으로서의 현실을 대비시킨다. 그렇게 해서 포드 영화의 주인공들은 결말부분에 대개 홀로 고립돼 있다. 할리우드가 원하는 해피엔딩의 내러티브 규율에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면서 존 포드는 현재와 미래의 어두운 그늘까지 끌어안았다. 때가 때인 만큼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서울아트시네마에 소개하면서 나는 존 포드의 영화가 그려 보이는 것이 아트시네마가 한때 꿈꿨던 무구한 시네필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의 은유처럼 다가와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서울아트시네마를 향한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