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 하나 잘 키웠다 싶었다. <평행이론>에서 김석현(지진희) 부장판사의 사무관 서정운은 15년 동안 상사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했다. 그런 그를 어느 누구보다 신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서정운은 따뜻함을 감추고 차가움을 꺼내 보인다. 극에서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 제법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배우 박병은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용감하게 부딪친다. 마치 서정운이라는 옷은 자신만이 소화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하마터면 ‘박병은표 서정운’을 못 볼 뻔했다. 원래 임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배우에게 최종 통보를 하기 전에 후보들을 다시 검토했던 권호영 감독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은씨 안 데려오면 후회할 것 같아요.” 처음으로 상업영화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맡은 만큼 그는 정말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박병은은 안경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이라는 생각에 마음 단속을 단단히 했다. 마음 단속의 첫 번째 과제는 욕심 부리지 않기였다. 마지막에 임팩트가 있는 역할인 만큼 관객에게 미리 감정을 내비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과제는 서정운을 마음속에 붙들어놓기였다. 끊임없이 “(서정운은) 나야. 나야. 나야. 그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지금 기분이 어떨까” 하며 역할에 빠져들려고 했고 또 빠져들었다.
이처럼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다보면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럴 땐 낚시를 하러 간다”는 그는 ‘낚시 예찬론자’다. “낚시는 연기와 비슷한 것 같다. 끝이 없잖아. ‘몇 마리 낚으면 잘한다, 못한다’ 그런 것도 없고.” 낚시 때문에 안 가본 데가 없다는 박병은은 “낚시와 여행을 통해 외로움을 즐긴다. 배우로서 이런 외로움은 생각과 감각에 분명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조급함이 없는 성격도 아마 이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또래 배우들에 비해 몇편 안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얼마나 솔직하게 연기할 것인가만 신경 쓸 뿐”이다. 어떤 거센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단단한 태도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의 다음 선택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로드 넘버원>이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야심만만한 한국군으로 “얄미운 면모를 가진 인물”이라고 한다. 진중한 그의 태도로 보아 왠지 정말 얄미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