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은 밤 사이에 어떤 알을 낳았을까? -가스통 바슐라르 <꿈꿀 권리> 중에서
1. 모네의 정원
수련은 여름꽃이다로 시작하는 문장이 있다. 그건 맞는 말이다. 처음 파리에 갔을 때 모네의 정원이라 불리는 오랑주리로 달려간 적이 있다. 내 몽상의 이미지 속에 가득 찬 수련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원의 곁에 머물러 새벽마다 수련을 바라보던 모네의 눈속을 드나드는 상상은 즐거웠다. 수련을 바라보는 일은 몽상의 성층권으로 끊임없이 어떤 이미지들을 끌어올리는 일 같았다. 고백하자면 그 시절은 무언가 세상의 선명함으로부터 희미해지는 연습 따위를 해보고 싶었던 무렵이었다. 그걸 시가 오려는 환지통이라고 불러도 좋았고, 시가 되려다 만 어떤 임계점 같은 것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모네는 수련을 물이 꾸었던 꿈으로 본 걸까.’ 내가 파리를 떠나면서 조그만 수첩에 내린 음절들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기념으로 사온 그림 한장 아직 내 침대의 머리맡이다. 방을 자주 바꾸며 살고 있지만 그 수련이 핀 정원은 늘 잠드는 내 머리 위에 떠 있다. 사람들에겐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거처가 하나 있게 마련이다. 머리맡의 그 정원이 내겐 그런 곳 중 하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수련이 가득 핀 자신의 정원을 가장 먼저 둘러보는 한 시인의 사생활이다. 잠들기 전 그 수면을 바라보는 것은 두 종류의 수면을 이해해가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눈을 뜨고 마주하는 저 수면(水面), 지금부터 눈을 감으면 시작되는 수면(睡眠), 그 간계(間界)를 떠다니며 흐득흐득 번져 있는 몽상의 수련.
자주, 수련을 그리기 위해 새벽에 모네가 집을 나설 때 화폭과 함께 들고 나오곤 했을 우유가 담긴 철통 하나를 떠올리곤 했다. 한손으로 온기가 조금씩 사라져가는 철통의 우유를 마셔가며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입술을, 수련처럼, 자신도 모르게 촉촉이 번진 입가의 흰 우유 거품을.
2 시간의 수분들
모네는 물이 잘 먹는 유화용 붓을 주로 사용했다. 모네는 그 붓으로 새벽마다 수련을 향해 말을 걸었다. 붓은 수련을 이쪽으로 옮겨오면서 조금씩 닳아갔으리라. 한잎의 수련을 옮기고 붓은 그곳으로 다 스며버린 것은 아닐까? 모네의 수련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번지는 것들을 옮기기 위해선 그에 알맞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모네의 붓은 수련이 피어 있는 동안, 그 시간을 옮기기 위한, 수련의 시간을 옮기고 있는, 섬세한 노역이었다. 조금씩 그 꽃의 시간을 덜어오는데 붓은 느리고 충실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그림에는 다른 시간으로의 이식을 꿈꾸고 있는 흔적이 있다. 이식이라는 개념에는 어느 한쪽의 상실도 존재해서는 안될 만큼 정밀성이 요구된다. 수련이 저쪽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당위성과 같은 시각 이곳에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예술가는 요밀한 계산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붓은 그 사이를 부드럽고 엄격하게 흘러다닌다. 그것은 창조를 마주칠 때 예술가들의 오래된 몽상법 중 하나다. 바슐라르는 수련이 물의 맥박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수련이 물의 맥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건 우리에게 그림의 몽상을 돕는 훌륭한 방법을 제공해주며 수련의 맥박을 느끼는 물의 몽상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혹은 그림이 저 스스로를 몽상하고 있는, 그림 속의 언어이다. 이식의 원리는 수련의 맥박을 단지 완전히 안전하게 옮겼다는 느낌에서 끝내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어떤 상태로 번지는 몽상의 이력이라고 보는 편이다. 무더기의 음절들이 그것을 이야기해줄 리가 없다. 모네는 되도록 천천히 수련이 품고 있는 시간의 수분들을 옮기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저 공간을 그린다는 느낌보다는 이곳으로 그 공간이 번지도록 붓을 조련했을 것이다. 마치 거의 보일 듯 말 듯 전개되는 수련의 개화(開花) 속에 자신의 붓질을 조금씩 감추어두듯이.
물은 묽으면서 동시에 희미하다. 물이 품고 있는 시간을 화폭으로 옮기는 일은 수련이 새로운 곳에서 숨을 쉬고 섭생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공간을 옮기는 일이기도 하다. 모네는 어떻게 정원의 물을 들여다보면서 수련의 섭생공간인 그 수분을 화폭으로 이식해올 수 있었을까?
3 부력의 몽상
수련을 물에 떠 있는 번짐과 희미함쪽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몽상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부력의 몽상이다. 부력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힘의 과정이고 보이지 않게 번지고 있는 세계의 생명이다. 부력을 잃은 고기들이 물 밖으로 떠올라 죽듯이, 손에서 놓쳐버린 풍선이 허공에서 어느 순간 부력을 잃어버리고 땅으로 푸르륵 꺼져버리듯이, 부력을 잃어버린 세계는 금방 실체가 드러난다. 인간의 세계에서 가령, 우리가 모르는 세계로의 이동 같은 것을 떠올릴 때 ‘꿈, 잠, 주술, 몽상 같은 것들’, 이 부력의 실체는 어떤 생명성보다 강한 밀도와 색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예술의 창조 작업에 있어서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도 부력은 다른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몽상 중 하나인데, 가령 외로운 날이면 우리의 두눈에 떠 있는 부력만으로 세계를 상대했듯이 다른 세상을 만나는 데 꼭 필요했던 자신의 발성법과 언어체계를 우리는 몽상이 아니라면 어떤 생명이라고 명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 감정과 벌였던 수많은 별거와 이동을 어떻게 견뎌왔던 것일까? 나는 끊임없이 꿀을 모으며 맹목에 대한 통찰을 버리고 꿀의 밀도를 택한 벌들의 순례를 몽매라고만 부를 수 없는 생태계에 살고 있다.
모네는 수련의 부력을 그림의 풍경으로 옮겨오면서 자신만의 다른 부력을 감추어두었다. 숨겨둔 부력이 그림 속으로부터 살아나 수련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림 속의 수면은 부력이 모습을 감춘 채 흘러다니는 아주 은밀한 장소가 되어간다. 사람들이 그림을 볼 때마다 부력의 현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모네는 그림 속에 부력을 흘려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을 갖도록 돕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부력은 인간의 새로운 눈을 돕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현재에 새로운 몽상이 피어나도록, 누구나 수련 속에 나비 한 마리를 살며시 가두어두듯이.
수련은 부력을 가진 꽃이다. 바슐라르는 어느 날 우리가 아름다움을 너무 의식해서 해가 저무는데도 숨으러 갈 수가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백조의 고귀한 알’처럼, 수련은 문득 아침에 피어 있다고 몽상의 이미지로 가득한 바슐라르의 글들과 모네의 그림만 번갈아 보아도 시간이 금방 가버리는 시절이 있다. 수련은 바슐라르와 모네의 사이에서 피는 또 하나의 몽상인 것이다. 하나의 수련을 몽상한다는 것은 어떤 부력을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 마리 내 머리맡의 수련 위에 앉아 잠시 발목을 쉬어가듯이.
필자소개: 김경주 시인, 극작가, <아마추어 무선 종이컵통신> 편집장.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산문집 <패스포트>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