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휩쓸린다’는 감각은 현대인에게 친숙하다. 정보와 노동의 속도는 생체 리듬을 추월하고, 자극성 강한 감상주의적 문화는 우리 마음을 급작스레 들었다 놓기를 거듭한다. 해일처럼 덮쳐오는 일상의 사태와 감정 속에서 우리는, 있는 힘껏 헤엄쳐야만 간신히 제자리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고 느낀다. 하물며 세상의 흐름을 역류해 원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거의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혼란이 엄습해 쉽사리 물러가지 않을 때 대응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묘사’하는 것이다. 묘사하는 행위는 텔레비전의 ‘느리게 다시 보기 화면’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당면한 사태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해주고, 그 가장자리에 처한 자신의 상태까지 파악할 여유를 준다. 주관적 시점으로 조율된 리얼리티는, 간혹 상상치 못한 의미나 아름다움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이를 ‘보기’와 ‘쳐다보기’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에게 ‘묘사’의 도구는 말과 글이겠지만, 예술가에겐 각자의 도구가 있다. 팝 바날리즘(banalism, 사소하고 진부한 것을 그린다는 뜻) 작가라고 불리는 폴란드 화가 빌헬름 사스날(1972~)은 생활의 표면을 구성하는 온갖 이미지에서 소재를 취한다. 일례로 2001년작 <폴란드의 일상생활>은 만화 형식으로 아내의 입원, 아들의 탄생, 아파트 내부 공사 등을 기록해 “최초로 70년대생의 사실적 일상사를 쓴 연대기 작가”라는 평판을 불렀다. 정보화 세대 화가에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의 현실은 매개된 현실- 잡지, 광고, 신문의 사진, 만화, TV, 인터넷 이미지- 을 포함한다. 언론에 공개된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의 장비를 무심한 정물화처럼 그리는가 하면, 구소련의 선전선동용 이미지를 순수 장식미술로 재현한다. 역사를 전유해 주관적 비전 안으로 끌어당겨놓고 시치미를 떼는 식이다.
대상의 이미지를 본래 맥락에서 비스듬히 이탈시키는 사스날의 경향은, 사생활의 풍경을 묘사할 경우에도 발견된다. 2009년작 <무제>는 웅덩이 가장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반영을 들여다보는 화가의 어린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아내의 모습을 담았다. 단란한 가족의 한때를 담은 스냅 사진처럼 보이지만 이 그림에는 감정의 직접적 전이를 꺼리는 베일이 덮여 있다. 붓자국을 노출하면서도 묘사의 선과 색면을 단순화하는 붓질, 색채를 자제한 흑백 위주 팔레트가, 복제된 이미지의 구체성을 지우고 그 흔적과 그림자만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상회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이 그림에서 흔히 우아한 디자인에서나 발견되는 매력을 느끼게 된다. 결국 사스날의 회화는 매우 동시대적이고 내밀한 스토리에서 출발해 대단히 사실적인 묘사로 완성되면서도 관객의 반응을 지정하기 직전에 멈춘다. 이 화가에게 페인팅은 덜어내고, 환원하고, 거리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영화 이미지가 포토리얼리즘을 넘어 촉각까지 파고드는 요즘, 우리가 장차 시각 예술에서 그리워할 미덕은 적당한 거리에 대한 사려가 아닐까 하는 상념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