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심한다. 유년의 독서와 달리 어른이 되고 나서 읽은 책들의 기억이 쉽게 휘발되어버리는 이유는, 그 책들에 삽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내게 도도새의 생김새를 가르쳐준 교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가 존 테니얼이었고, ‘푸시미펄류’라는 머리 둘 달린 동물의 이상야릇한 이름을 여태 외는 건 순전히 <돌리틀 선생님 항해기>(그때는 ‘두리틀’이 아니라 ‘돌리틀’이었다!)의 작가 휴 로프팅의 그림 덕이다. E. H. 셰퍼드가 그린 곰 푸우와 아기돼지의 뒷모습이 아니고서야 <위니 더 푸우>의 ‘백 마지기 숲’은 그렇게 다정한 장소가 될 수 없었을 터다. <꼬마 니콜라>에 북적대는 많은 인물들의 성격을 구별할 수 있는 건 장 자크 샹페 화백의 공적이다. 이 삽화들은 내가 아는 한 타임머신에 가장 가까운 물건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잃어버린 낙원의 오후로 데려다준다. 이탤릭체 외래어들의 이국적 유혹, 점자처럼 뒷면에 배긴 조판활자의 자국을 더듬는 간지러움, 새 동화책의 빳빳한 종이에 손가락을 베는 달콤한 통증을 한꺼번에 부활시킨다.
스스로 동화작가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아디존(Edward Ardizzone, 1900~79)은 셰익스피어, 디킨스를 위시한 여러 작가의 책에 삽화를 그렸고 2차대전 종군화가로서 훌륭한 사료를 남겼으며, 가난한 런던 시민의 남루하고 따뜻한 일상을 스케치했다. 그는 말을 더듬었으나 빠른 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림 그리는 티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스케치북 대신 작은 공책을 성무일과서처럼 끼고 다니며 끊임없이 펜을 놀렸다고 한다. 엘리너 파전의 동화집 <보리의 임금님>(Little Bookroom)*의 서문 삽화 <작은 책방>은 독자를 상냥하게 환대한다. 이제 막 책을 펴든 소년, 소녀들은 이 그림에서 반가운 자화상을 볼 것이다. 아디존의 그림은 가는 평행선과 직교하는 평행선으로 묘사한 그늘과 더 짙은 그늘, 더더욱 짙은 그늘을 병치하는데, 이는 눈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도를 낮춘 방에 들어선 기분을 자아낸다. 이처럼 그림자가 지배적인 그림이 온유한 기운을 발하는 점이 미스터리다. 한 가족의 나른하고 단란한 휴식을 그린 <모차르트를 듣는 시간>은 물을 많이 탄 중간색들이 펜선과 화목하게 어울리는 아디존의 수채화 화풍을 보여준다. 두 그림 모두 호들갑스러운 정밀묘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공기 중을 떠도는 금빛 먼지가 손에 잡힐 듯하다.
삽화는 무엇보다 ‘작은 그림’이다(책이 커봤자다). 삽화가의 재능은 화가의 그것과 통하지만 다르다. 아디존의 그림은 쿠션과 같다. 회화가 우리를 드러눕게 한다면 그의 삽화는 우리를 기대게 한다.
*현재는 <작은 책방>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