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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놀라운 현실감 갖춘 퇴행적인 동화

<아바타>의 현시적이고 자기 환원적인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가닿는 곳은

<아바타>는 벌써 많이 말해졌고 앞으로 더욱 많이 말해질 것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아바타>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각 체험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느끼게 하고 있으며, 21세기 영화는 이 새로운 체험을 두고 그것의 산업적 유용성과 미학적 가치를 판별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쏟게 될 것이다. 물론 논쟁도 불가피할 것이다. 지금으로선 어떤 논의도 잠정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아바타>를 지지하지 않은 소수에 속한다. 그 근거에 대해 말하려 한다.

‘수정주의 서부극’라는 불분명한 정의

먼저 한 소수자의 체험담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소설가 김중혁은 ‘뭐가 대단한지 모르겠다’고 썼다(<씨네21> 735호).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래전에 착상되고 현실화된 3D의 기술을 좀더 ‘실감’나게 만들었다는 것 외에 이 영화에서 새로운 게 없으며, 무엇보다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논점으로 좁혀진다. ‘실감’과 ‘이야기’. 전자는 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연관된 쟁점이고, 후자는 주로 고전적 서사와 연관된 쟁점이다. 분리된 쟁점은 아니지만, 편의상 후자에서 시작해보기로 하자.

몇몇 필자들이 <콜 미 조>를 비롯한 몇몇 SF소설와 함께 1970년대의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이 서사의 연원을 찾고 있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새롭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지만 동시에 “기술과 주제의식을 단단히 결합하는 드라마 투르기”(김도훈), “제임스 카메론은 <작은 거인>의 프리퀄을 이제야 만들었다”(주성철)라며 서사의 일정한 성취를 인정하거나 모종의 진전을 암시했다(흥미롭게도 <아바타>의 열렬한 지지자인 영화평론가 김봉석이 오히려 <씨네21> 736호에 실린 좌담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가 진부하다는 점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적했다). 로저 에버트도 “카메론은 캐릭터에 충분한 힘을 쏟았고… 어느 편이 이기는가의 문제보다 더 크고 시급한 이슈들이 이 영화에 있다”고 말했고 피터 트래버스도 “마이클 베이와 달리 제임스 카메론은 테크놀로지를 스토리텔링에 장착하는 법을 안다”고 비슷한 뉘앙스로 썼다. 앞서 제기한 쟁점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해도, 특히 국내 필자들이 이 영화와 관련 지어 종종 언급하는 ‘수정주의 서부극’에 대한 오해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용어를 쓰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정의가 분명하지 않은 이 단어의 용례들을 훑어보니 ‘서부개척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을 지닌 영화’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수정’의 대상은 1800년대 미국의 서부 팽창정책을 합리화하는 관변적 시각일 것이다. 그런데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단어는 기존의 시각에 대한 ‘올바르게’ 수정된 판단이라는 역사 해석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그런 관변적 시각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그 수정 이전에 주류를 차지했고, 그것이 고전기 서부극이라는 전제하에서 종종 사용된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의 고전기 서부극의 시대란 없었으며(그런 시각을 지닌 소수의 영화들이 있었다 해도) 따라서 그 전제는 그릇된 것이다.

나비족은 우리의 집단적 자아 이상형

물론 인디언에 대한 묘사 방식이 모던 웨스턴, 심리적 웨스턴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경향의 서부극이 다수 등장한 1950년대부터 우호적인 쪽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경향에 속한 <하이눈>이나 <셰인> <추격자> 같은 영화를 수정주의 서부극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는 윌리엄 웰만의 1940년대 서부극들(<옥스바우 사건> <버팔로 빌>)의 ‘수정주의적’ 시각을 지닌 영화들이 시대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 무엇보다 고전기 서부극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역마차>(1939)야말로 서부 개척마을 나아가 문명에 대한 냉정한 비판적 응시의 산물이다. 태그 갤러거 같은 영화 연구자는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초기 서부극들에서도 영웅의 양면성, 냉소적 시선, 사건이 미해결된 종결, 비극적 결말이 다수라는 사실에 근거해 서부극의 진화라는 관념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서부극은 처음부터 미국 문명의 자기 회의에서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이것과 유사한 사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젊은 한국 감독들의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나올 때마다 저널리즘이 종종 ‘기존 반공영화의 한계를 벗어난’이라는 수사를 써온 관행이다. 그러나 그 젊은 영화들 중에 반공영화상까지 받은 임권택의 <짝코>(1980)보다 영화적으로도 그리고 성찰의 깊이에서도 더 나아간 영화는 없었다).

새삼스레 영화사의 시대 구분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의 ‘수정주의적’ 시각이 이 영화의 자질과 완전히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종의 퇴행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타자를 이상화하는 것은 타자를 악마화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이것이 ‘수정’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수정이다. 몇몇 필자들이 언급한 <작은 거인> <늑대와의 춤을>은 서부극의 위대한 전통과 무관한 범작이며, 특히 후자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전세계적으로 인기있는 미국적 소재인 ‘인디언’이라는 낭만적이고 주술적인 기호의 팬시 상품에 가깝다.

‘대평원에서의 자연과 합일한 생태주의적 삶’, ‘완전한 공동체의 유지 능력과 전사의 전통’, ‘문명에 의한 추방과 소멸’ 등의 신화화된 사실/풍문들과 결부된, 이 종족이 불러일으키는 향수와 비극적 정조는 <늑대와 춤을>에서 그랬듯 그대로 <아바타>의 전략이 된다. <아바타>의 나비족은 이 모든 것들을 갖고 있는데다(소멸된 과거라는 점만 빼고) 어떤 결핍도 발견되지 않는 완벽한 종족이다. 게다가 이 종족의 전사들은 익룡을 닮은 이크란을 타고 창공을 비상한다. 우리 중 누가 그들 편에 서지 않을 것이며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을 것인가. 나비족은 고스란히 우리의 집단적 자아 이상형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재미없다고 느낀다면 이 때문일 것이다. 첫 10분만 보면 선과 악이 바로 나뉘어지고, 악이 자기를 회의하지 않는 동안 너무도 완벽한 선은 어떤 내적 균열도 보이지 않다가, 결국 선의 승리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 선이 외모와 생활양식에서 인디언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나비족이고, 악이 탐욕으로 가득한 문명화된 인류라고 해도 이 순진한 서사는 서부극의 전통과 무관함은 물론 최근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자기 분열적이며 신경증적인 심리주의에 비해서도 퇴행적인 동화이다.

생물학적 뉘앙스의 ‘변형’이라는 모티프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신기한 ‘볼거리’에 경탄하거나 아니면 별것 아니라고 폄하하는 일뿐일까. 하지만 <아바타>가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에 신기한 구경거리를 결합했다고만 말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다. 김봉석은 이야기가 뻔해진 것이 “낯선 공간과 캐릭터이다 보니 이야기의 수용성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주류 관객이 좋아하는) 진부한 얘기로 갈 수밖에 없는 한계”라며 변호했다. 엄청난 비용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론칭하는 데 어느 정도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서사의 불가피성은 그 테크놀로지 외부(예컨대 비용의 안정적 회수 필요라는 환경적 한계)가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비롯된 건 아닐까.

앞서 이 영화의 이야기를 ‘문명화되고 타락한 인간 종과 전 문명 혹은 초 문명 상태의 순수한 외계 종과의 대결’이라고 요약했다. 그런데 한 가지 요소를 빠트렸다. 그것은 ‘변형’(transformation)이라는 모티브다. 인간의 육신이 유전자 합성을 통해 나비족의 육신으로 변형되는 것. 정확히 말하면 1단계는 유전자 합성으로 태어난 유사 나비족 육신을 모종의 전자-생물학적 통신 메커니즘을 통해 유전자를 제공한 인간의 육체로 감각하고 통제하는 것. 결말에 등장하는 2단계는 주인공이 자신의 유전자가 합성된 나비족 육신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오늘은 내 생일이거든요”). 이것은 은유로서의 변신이나 어떤 결단을 통한 사회적 정체성 이동이 아니라, 육체 그 자체의 질적 변화다. 따라서 이것은 차라리 생물학적 뉘앙스의 변태(變態, metamorphosis)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바타>의 서사는 고전기 영화에서처럼 영웅이 어느 편을 선택하고 지지하느냐의 문제 이전에, 어떻게 육체가 변형되느냐 혹은 어떤 변태를 욕망하느냐에 관한 영화다. 그러므로 이것은 수정주의적 시각 따위가 아니라, 신체의 어떤 결핍의 감각에 호소한다(친절하게도 제임스 카메론은 완벽하고 순수한 나비족의 육체 되기를 소망하는 주인공 제이크의 신체를 불구로 설정해놓았다. 그는 하반신 불구인데도 “뛰고 싶었다”고 말하지 않고 “날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변형/변태 욕망은 <아바타>라는 제목에서부터 그 동화적 이야기의 전개과정에까지 가장 뜨거운 순간들을 빚어낸다. 이 변형/변태의 실현의 순간이야말로 이 영화가 주는 감각적 쾌락의 중심부에 놓인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뭉클한 순간은 나비족 전사가 된 제이크가 익룡 형상의 이크란을 길들인 뒤 그를 타고 비상하는 장면이었다.

변형/변태의 욕망은 보편적이며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하지만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그 욕망은 복수의 정체성들에로의 이동을 가능케 한 디지털 미디어의 권능으로 날개를 달았다. 온라인의 ID와 아바타, 가상현실 게임의 캐릭터들을 통해 더이상 관객이 아닌 유저들은 여러 정체성들 사이를 유영한다. 그 이동 가능성이 현실 인식 능력이 아니라 컴퓨터 조작 능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폐쇄적이지만, 자신의 욕망에 개방적이라는 점에서 양면적이다. 제목이 명시하듯, <아바타>는 유저와 온라인상의 대리자와의 관계를 현대 유전공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서사 내부로 끌어들인다. 그런 점에서 <아바타>는 디지털 미디어의 지배력 확대에 직면해 디지털 미디어 체험의 일부를 전용하면서 대중영화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안간힘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바타>의 변형/변태는 어디를 향해 있는가.

우리는 변형/변태의 모티브를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 과거의 영화들을 알고 있다.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등이 등장하는 호러, 혹은 데이비드 린치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의 슈퍼히어로 영화들. 그런데 이들 서사에서 변형/변태는 대개 실패한 과학 실험(<프랑켄슈타인> <플라이> <헐크>), 돌연변이(<엑스맨>), 사고 혹은 외상적 사건(<스파이더 맨> <배트맨>) 등의 불행한 사건 혹은 우연에서 시작되고, 주인공들은 초인/괴물로의 변신의 대가로 고립과 자기 유배, 정체성 혼란이라는 대가를 치른다. 자기 안의 심연과의 조우, 타자와의 대면, 단일 정체성 붕괴에의 직면 등 그것을 어떻게 부르든 이 영화들은 그 순간의 공포와 불안을 그 매혹과 함께 어떤 층위에서든 새겨놓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20세기 영화의 자장 안에 놓여 있을 것이다.

<트랜스포머>를 닮았네?

<아바타>와 비교하기 위해선 디지털 체험과 연관된 변형/변태의 모티브를 채용한 최근의 영화들을 떠올리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먼저 10년 전에 만들어진 <매트릭스>. 절대화한 권능의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일상적이고 화사한 가상현실 매트릭스, 냉기와 궁핍과 죽음의 위협으로 가득한 실제 현실 사이를 앤더슨/네오 일행은 오간다. 이 영화의 아이러니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가능해진 가상현실에서의 네오 일행의 천상의 무용과도 같은 액션이 이 영화의 감각적 쾌락을 제공하지만, 그 액션이 결국 음습한 실제 현실로 되돌아오기 위한 사투라는 점이다.

가상공간 내에서 무제한의 변신의 활력이, 그런 활력이 부재한 실제 현실과의 대면 혹은 실제 세계 속으로의 최종적 변신/재탄생(“웰컴 투 리얼 월드”)을 위해 바쳐질 때 이 영화는 디지털의 권능을 하나의 사건으로 파악하고 그 사건을 우화화하면서 우리에게 가능한 결단의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고전적이며, 굳이 분류하자면 포스트 모더니즘보다는 포스트 리얼리즘에 가깝다(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로도윅은 <매트릭스>를 ‘고전적’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데이비드 보드웰은 이 영화를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이라고 주장하지만 보드웰 자신이 정의한 고전적 할리우드의 플롯 패턴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영화는 <아바타>와 연관되어서는 잘 말해지지 않는 <트랜스포머>이다. 물론 변신 로봇은 새로운 소재가 아니다. 하지만 외계물체인 오토봇은 독립적인 인격체라 해도 궁극적으로 지구인 주인공의 의지에 종속되어 변형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유저-아바타의 관계와 유사하다. 게다가 이 영화 특유의 감각적 쾌락은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전투에서라기보다 가전제품 형상의 오토봇이 거대한 로봇으로 바뀔 때, 그 변형의 무한한 활력에서 온다. 작은 카세트가 순식간에 매끈한 스포츠카로 또 전투 로봇으로 변신하는 아찔한 순간은 <아바타>에서 처음 나비족의 육신을 얻은 제이크가 평원을 달리는 흥분된 순간과 겹쳐서 떠오른다. 피터 트래버스는 마이클 베이를 폄하했지만, 나는 디지털 미디어 체험을 전용하는 방식에서 <아바타>가 <매트릭스>보다 <트랜스포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매트릭스>는 디지털의 지배력을 지각적 거리를 통해 세계 내적 사건으로 드러내지만, <아바타>와 <트랜스포머>는 그것을 이용 가능한 경험으로 끌어들여 거리를 삭제하고 환영성을 보강하려는 일종의 동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당겨 말한다면 디지털 시대의 할리우드영화는 이제 ‘트랜스포머’라는 기계 형상의 동화적 영웅, 그리고 ‘아바타’라는 유기체 형상의 동화적 영웅을 갖게 되었다. 두 영화의 차이점은 영웅의 형상에만 있지 않고 영웅의 위상에도 있다. 전자는 주인공의 친구이지만, 후자는 주인공 자신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독립적인 인격체인가 아니면 일체인가라는 서사적 차원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언급을 미뤄온 ‘실감’의 문제를 말할 차례가 되었다. 반복건대 <아바타>는 이야기에서도 캐릭터에서도 공간 구성에서도 SF적 상상력에서도 새롭지 않다. 이 영화의 제작공정에 필요한 복잡다단한 고비용의 기술을 알지 못하는 관객의 눈으로 볼 때 <아바타>는 오래된 것들에 비추어 조금씩의 차이만 보게 된다. 인간과 나비족의 차이, 구체적으로는 인디언과 나비족의 차이, 유전자결합 생명체와 인간 혹은 나비족의 차이, 지구와 판도라의 차이, 인간 액터와 더 유사해진 디지털 액터의 미묘한 차이 등등. 그런데 <아바타>는 이 모든 약간의 차이들을 종합하며 그것을 새로운 전체로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이 이 영화의 3D가 가진 마술인 것 같다.

영화적 공간 안에 있다고 느끼게 하는 ‘실감’

‘실감’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이 마술의 핵심은 거리의 삭제 및 그와 연관된 현재감이다. 오래된 3D가 그냥 신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3D라기보다 몇개의 평면들을 겹쳐놓은 영상이라는 사실이 지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그 평면들의 단절감을 거의 없애버렸다. 말 그대로 관객이 영화적 공간 안에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2차원 스크린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공간적 연속성을 해치지 않는 편집뿐 아니라 한숏 안에서 통일감을 유지하면서도 이런 공간감을 빚어내기 위해 아마도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다. 동시에 이 공간감은 우리가 2차원 평면의 스크린을 대할 때 유지하던 지각적 거리를 소멸시키고, <아바타>를 20세기 필름이 제시한 재현전하는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시간의 현재감을 안겨준다.

이 대단한 테크놀로지의 목표는 테마파크에 들어온 듯한 공간감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이런 공간감은 이미 로버트 저메키스에 의해 효과적으로 시도되었다), 그 입체감이 주인공의 육체가 내 육체가 아니지만 내 육체의 변화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동일시의 절대화를 향해 있다. 이 동일시는 서사와 캐릭터 구축 이전에 발생하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동일시이다. 다중 주체로의 변형의 활력이라는 디지털 체험을 전용하면서, 물리적 변형이라는 모티브를 생물학적 변태라는 모티브로 바꾼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제이크-유전자 합성된 나비족 제이크’의 관계는 서사 외적으로는 ‘실제 배우-디지털 액터’의 물리적 관계이지만, 서사 내적으로는 ‘인간-유전자 합성된 우월한 종’이라는 생물학적 관계이다. 말하자면 <아바타>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변형/변태 욕망을 유전공학의 변형/변태 욕망으로 번안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디지털 체험의 활력을 흡수하면서도 감각적 동일시의 완성을 겨냥한 테크놀로지에의 욕망이 생명공학의 환상을 불러들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바타>는 모든 면에서 <매트릭스>와는 반대로 “웰컴 투 버추얼 월드”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과연 3D가 새로운 지각의 장이 될까

앞에서 <아바타>의 서사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서사는 속편에서든 이 테크놀로지를 차용한 다른 영화에서든 아마도 세련되어져갈 것이다. 남은 건 소멸되어가는 거리이다. 거리는 3D의 테크놀로지가 발전할수록 더 좁아질 것이다. 물론 그 거리의 인지는 절대적 거리가 아니라 공통된 지각 체험에 의해 공유되는 감각이다. 뤼미에르의 <기차의 도착>을 보고 19세기 관객이 현실로 착각해 도망갔다는 것은 믿기 힘든 풍문이 되었지만, 아기와 동물은 2차원 스크린을 여전히 현실로 인지한다. 21세기의 관객은 완벽한 3D영화를 보고도 그런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더 놀라운 구경거리로 인식될 것이다. 그 놀라움이 커질수록 거리는 사라져간다.

디지털 액터와 3D를 양축으로 한 영화의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지금까지는 현시적이고 자기 환원적이다. 우리의 소감은 카메론의 소망과는 다르게 ‘야, 이건 보지 못한 구경거리네’라는 테크놀로지 자체의 위용과 진전에 대한 감탄이다. 전투용 이족 로봇을 탄 야만적인 대령은 제이크의 아바타에게 “네가 나비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따위 동화를 믿어?”라며 전자-생물학적 교신 장비를 폭파한다. 물론 나비족이 인간 제이크를 구출하고 제이크가 완전한 나비족이 되면서 동화는 완성된다. <아바타>의 놀라운 현실감은 주체의 유동성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라는 이름의 완고한 자기동일성으로 회귀하는 데 기여한다. <아바타>의 퇴행적 이야기는 테크놀로지의 현시가 서사 내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처음엔 놀라운 구경거리였던 2D영화가 세계라는 사건과 타자의 형상을 대면하는 장소가 되어갔듯이, 디지털 액터와 3D 스크린도 어떤 시점에 일정한 평형에 이르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현시와 자기 환원을 멈추고 새로운 지각의 장소가 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그럴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 테크놀로지는 더욱 완벽한 현실감, 어쩌면 그 자체를 현실로 지각하도록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끝없이 달려가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질주가 성공할 경우 도달하게 될 종착지 중 하나는 아마도 우리가 <매트릭스>에서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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