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파커 감독이 드디어 <도리언 그레이>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실망스러웠다. 올리버 파커야말로 오스카 와일드 고증의 전문가일 테지만, 어떤 그림이 나올지 훤히 들여다보여 김빠지는 기분이랄까. E. M. 포스터와 제임스 아이보리처럼 안전하지만 지루한 답습이 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감독이 소름 쫙쫙 끼치게 예쁜 남자애를 시골 구석에서 찾아낸 뒤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앵글에 퇴폐와 사악과 백치미와 나르시시즘을 덕지덕지 발라 온 신경세포를 들끓게 하길 기다렸건만. 백현진의 노래처럼 살아 움직이고 말하는 도리언 그레이를 ‘눈이 빠지고 목이 빠지게’ 학수고대했건만. 벤 반스라니. 등장하는 순간, 한숨과 탄식이 팡파르처럼 터져야 할 (<베니스에서 죽다>의 타지오처럼) 도리언 역할을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의 캐스피언 왕자에게 맡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벤 반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하얗고 촌스러운 채 얼빵해 보이기까지 한다. 원작에서 도리언 그레이를 묘사한 문장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청순함과 순결함, 이면의 은밀한 악덕과 부도덕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앙할 수밖에 없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은 그에겐 전혀 없다. 도리언 그레이가 아름답지 않은 <도리언 그레이>는 당연히 시시하다.
다만 빅토리아 말기 시대를 재현한 의상과 가구와 소품들, 음울하고 으스스한 런던 뒷골목 분위기와 파이프 아편을 파는 클럽은 볼 만하다. 헨리와 도리언이 처음 만났을 때, 도리언을 앞으로 파탄과 악행의 길로 이끌 징조로 쓰이는 은제 담배케이스는 이후 줄곧 등장한다. 도리언은 거울처럼 비치는 담배 케이스를 열어 살롱 안의 여자들을 알아차리게 못하게 염탐하고, 사교계의 총아로서 자태를 뽐내야 할 때도 걸핏하면 담배 케이스를 꺼낸다. 늙고 병들고 추해지는 건 초상화의 몫일 뿐, 언제나 청년의 얼굴인 덕분에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을 때도, 이름이 새겨진 담배 케이스는 결국 도리언 그레이의 정체를 탄로나게 만든다.
영화는 약간의 볼거리에 의지한 채 절뚝이듯 이어지다가 판타지 장르처럼 우스꽝스럽게 끝난다. 이 영화에서 원작의 기묘한 우아함을 찾는 건 포기해야 한다. 짜릿한 순간이라곤 헨리 경의 대사, “유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다”뿐이니까. 영화의 제목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아닌 <도리언 그레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오스카 와일드의 팬들은 그 뜻을 이해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