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자책점, 즉 방어율은 투수가 자신의 실책으로 잃은 점수를 매 경기 단위로 환산한 기록이다. 28년의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평균자책점 부문의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한 이가 바로 선동열. 통산성적 1.20으로, 이것은 말하자면 9회 내내 공을 던져서 1점 남짓의 점수만을 상대에게 주었다는 얘기다. 1~2년의 기록이 아니다. 그가 한국 프로야구의 마운드를 지킨 11년 동안 상대팀은 게임당 평균 2점도 뽑지 못했다. 그 11년간 선동열은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의 수호신이었고, 상대팀에는 패배의 아이콘이었으며, 성적이 좋지 못한 대학생들에게는 학사경고 학점의 대명사였다.
레전드로 남은 영광스러운 선수 생활을 뒤로 한 지도 어언 10년. 이제 지도자로 야구 인생의 제2장을 써가는 선동열 현 삼성 라이온즈 감독과 그 전설의 프리퀄을 스크린에 담았던 김현석 감독이 만났다. 다소 의외였지만, 영화 <스카우트> 개봉 이후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올 시즌 한국시리즈에서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무려 12년 만의 우승이라 팀의 레전드이며 오랜 팬인 두분의 감회도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선동열: 제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우승했으니까요. 고향 팀이 오랜만에 좋은 성적을 내서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나마 응원하고 있기도 하고요.
김현석: 올해로 우승 기록을 딱 10번 채웠잖아요. 선 감독님이 계셨을 때는 우승해도 별로 안 기뻤던 거 아세요?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거였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타이거즈 팬이었으니까 86년 감독님 입단하고 그해 우승했을 때는 당연히 기뻤지만, 이후 93년까지 6차례 우승할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기분이었어요. 감독님이 일본 가고 나서 96년에 우승했을 때는 정말 기뻤고요. 올해는 12년 만이다 보니 정말 말할 것도 없죠.
두분의 인연이 <스카우트>를 통해 만들어졌으니, 영화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김현석: 영화 보셨나요? 개봉 무렵 베이징올림픽 대표팀 일(투수코치) 때문에 못 보신 줄 알았는데.
선동열: 네, 그랬었죠. 나중에 DVD로 받아서 봤어요. 사실 제 입장에서는 애초 김 감독님에게 제의를 받고 나서도 ‘나 같은 사람 이야기가 영화로 나오면 흥행이 될까?’라는 입장이었어요. (웃음) 개인적으로는 감회도 새로웠고 영화를 보는 내내 옛날 추억도 많이 떠올랐습니다.
김현석: 감독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서 오키나와 전지훈련장까지 찾아가 뵙고 부탁드렸었거든요. 그때 너무 흔쾌히 수락해주셨고 영화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어요. 사실 대학교 입학 때는 영화에서처럼 힘들지 않았고 해태 타이거즈 입단 당시에 훨씬 더 치열했다고 하더라고요. 라이벌 학교에서 못 빼가게 선수 감금하는 일화는 예전 스포츠 신문 기사들을 많이 참고했고요. 그 당시에는 그런 경우들이 참 많았거든요.
선동열: 맞습니다. 저도 그것 때문에 1주일 동안 학교에 못 나간 적도 있었어요. 감금까지는 당해보지 않았는데 주위 선배들이나 지인을 통해 강권을 많이 받았죠. 아버님께서 그런 압박들을 잘 막아주셨어요.
김현석: 어릴 때 스포츠 신문을 보면 선 감독님의 아버님 이야기가 자주 나왔어요. 집 뒷마당에 야구연습장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도 기사를 보고 알았고요. 다만 영화에서는 선 감독님 생가와 야구연습장이 좀 크게 나왔는데 실제로 그만큼 크지는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요. 사실 그보다는 작은 집을 섭외했다가 촬영 직전에 취소되는 바람에….
선동열: 김 감독님이 그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신 것 같아요. 실제 공간은 영화에 나왔던 크기의 1/4 정도였어요. 좌우 폭은 좁고 앞뒤가 길었죠. 그래도 티배팅(스트라이크 높이에 공을 올려놓고 하는 타격연습)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오늘날의 실내연습장 정도라고 보면 될 거예요. 전구도 7~8개 달아서 밤에도 연습할 수 있었으니까 동네 친구들과 매일 조깅하고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연습하고 목욕까지 한 다음에 각자 집에 돌아가곤 했죠.
김현석: 당시 선 감독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워낙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도 다 기사화되었잖아요. 그래서 참 편했어요.
선동열: 제가 보기에도 영화가 실제와 거의 비슷했어요. 영화에 보면 엄청나게 먹는 것으로 묘사되었잖아요? 그 당시에 정말 고기를 잘 먹었어요. 가족끼리 가서 떡갈비를 먹는데 제가 혼자서 열여섯대를 먹고 비빔밥 한 그릇까지 먹었으니까요. 말 그대로 16인분이죠. 그리고 그때는 떡갈비 한대 크기가 굉장히 컸어요. 영화에서처럼 스카우터가 오기 전에 다 먹어버린다든가 하는 스토리는 없었습니다만.
김현석: 사실 선 감독님께서 고등학교 때는 몸이 호리호리했잖아요.
선동열: 맞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키가 182㎝에, 몸무게가 66㎏정도밖에 안 나갔어요. 아주 말랐죠. 살이 찐 건 대학 2학년 때 82년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한 직후부터 몸이 무려 10~12㎏씩 불기 시작한 거예요.
김현석: 사실 선 감독님 배역을 캐스팅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인터넷을 통해 ‘고3 선동열을 찾습니다’라며 공모도 해봤고요. 그때 누가 이건주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요즘 관객은 전성기 시절 선 감독님의 체형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미지가 맞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게다가 ‘순돌이’가 가지고 있는 80년대 아이콘 같은 느낌도 살리고 싶어서 캐스팅하게 되었죠.
영화의 배경은 80년 5월의 광주입니다만, 고3 선동열은 당시의 현실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야구선수로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몸으로 느낀 적은 없으셨나요.
선동열: 해외무대에 진출하려고 했을 때 그런 벽을 느낀 적은 있어요. 저희 때만 해도 선수들 중에는 잘사는 집 애들이 거의 없었어요. 프로야구도 없었던 시절이라 대학 나와서 실업야구팀 입단하는 게 당시로서는 엘리트 코스였죠. 해외 진출은 꿈도 꿀 수 없는 거였고요. 그런데 제가 대학교 다닐 때, 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하고 나니까 메이저리그에서 교섭이 들어온 거예요. 한 다섯 구단에서. 그때 처음으로 꿈을 꾸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외국 나가려고 휴학계 내고 군대를 가려고 했어요.
김현석: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 때문에 면제받지 않았나요?
선동열: 면제 조건이 있었어요. 대학 마치고 아마추어나 프로 구단에 가서 5년을 뛰어야 면제가 되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외국에 진출하려면 시간 절약을 위해 일찍 군대를 다녀오는 편이 낫잖아요. 그때는 상무야구단도 있었어요. 논산 4주 훈련 마치면 상무팀에 입단하는 걸로 얘기도 끝났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휴학을 안 시켜주는 거예요. 학교 다 마치고 군대 가라고. 알고 보니 선수를 외국에 안 내보내려고 위에서 압력을 넣은 거더라고요. 5공 시절 이야기죠. 어쩔 수 없이 졸업 뒤에 실업팀 5년까지 마치고 외국에 나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한국화장품에 입단하고 시범경기까지 뛰었죠. 그런데 그때 프로야구가 생긴 거예요. 해태 타이거즈로 오라는 광주 팬들의 성화가 엄청났어요. 집에도 이상한 전화들이 끊이지 않았고요. 결국 부모님께서도 ‘외국 갈 생각 접고 고향에서 편하게 야구해라’고 하셨죠. 그래서 한국화장품에 입단해서 시범경기까지 뛰었는데 결국 다시 해태 타이거즈로 가게 된 거예요.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수 선동열이 수립한 경이적인 기록들은 하나하나가 전설인데요. 두분이 추억하는 ‘선수 선동열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김현석: 일단은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완투승 경기가 생각나고요. 그때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으니까 정말 야구를 좋아했을 때였죠. 그리고 91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마지막 공을 던지고 우승을 확정한 다음 장채근 포수에게 날아가서 함께 포옹하던 장면. 해태 시절에는 어떤 특정한 경기보다도 그 장면이 유독 생각나요. 사실 너무 압도적으로 잘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인 패배의 장면이 더 또렷하게 기억나요. 패를 기록하면 오히려 더 대서특필되었잖아요. 90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였나? 그때가 사실 해태의 한국시리즈 5연패 찬스였잖아요. 그런데 선 감독님이 홈런을 맞은 거예요.
선동열: 김용철 선수한테 맞았죠. 그날 3 대 0으로 졌어요.
김현석: 제가 재수할 때였는데, 충격을 받아서 1주일 동안 학원을 안 갔어요. (웃음)
선동열: 김 감독님 말씀처럼 이긴 날보다는 진 다음날 스포츠 신문 1면에 더 크게 나왔어요. 지금 경찰청 야구팀 감독으로 계시는 유승안 형님이 해태에 함께 있다가 빙그레로 갔는데, 제가 그 형님한테 만루홈런을 맞은 기억이 나요. 사실 제가 잘 못 던졌고 그 형님이 잘 친 게 맞는데, ‘너무 공이 빨라서 안 보이니까 그냥 눈 감고 쳤다’고 인터뷰를 한 거예요. 그래서 그랬는지 그 다음날 신문 타이틀도 ‘유승안 만루홈런’이 아니고 ‘선동열 만루홈런 맞다’라고 나와버린 거죠. (웃음) 선수 시절에는 제가 1년에 1~2패 정도밖에 안 했거든요. 그래서 그 패를 기록했을 때마다 이런저런 추억이 많아요. 저 같은 경우는 빠른 직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짧게 치는 타자들이 까다로운 편이었어요. 큰 것 치려는 타자들은 요리하기가 쉬웠고요. 이만수(현 SK 와이번스 코치) 형 같은 경우는 선수 시절 통틀어 저한테 안타 세개쯤 쳤을까요? 통산타율이 1할도 안된다고 봐야죠. 타자들에 따라 그 편차가 심했어요.
개인적으로는 86년 삼성과의 경기에서 퍼펙트게임(9회 동안 단 한명의 타자도 루상에 내보내지 않은 경기) 달성 직전에 장효조 선수에게 안타를 맞았던 장면이 기억나는데요.
선동열: 그때는 정말 욕심이 있었어요. 2 대 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8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안타를 맞은 거죠. 그때는 정말 경기에서 패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9회 초에 2점을 더 내주고 연장전까지 가서 11회에 겨우 완투승으로 이겼죠. 만약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퍼펙트게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노히트노런(9회 동안 단 하나의 안타와 실점도 기록하지 않은 경기. 볼넷, 몸에 맞는 공, 실책으로 인한 출루는 허용) 기록을 노렸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에서 6구째 파울이 나오다 보니까 볼넷을 안 줘야겠다는 생각에 스트라이크를 던졌다가 안타를 맞았거든요. 그때 볼넷을 줬다면 아마 노히트노런은 완성되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이후로는 그런 기회가 오질 않았어요. (웃음)
80년대에는 선 감독님 외에도 최동원, 김시진, 장명부 선수처럼 무시무시한 기록의 투수들이 시대를 풍미했었는데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는 왜 제2의 선동열을 만나기 힘든 걸까요.
선동열: 일단 그때 야구와 지금의 야구는 많이 다르죠. 발전한 게 사실이에요. 특히 타격 기술이요. 선진야구를 도입하면서 타격 부문에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어요. 또 저희 때 투수들은 헝그리 정신이 강했어요. 그리고 힘들어도 참고 던질 수 있는 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요즘 투수들은 그런 부분이 부족해요. 류현진(한화)이나, 김광현(SK), 윤석민(기아)처럼 재능있는 선수들은 많지만 스스로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는 던지지 않으니까요. 저희는 어렸을 때부터 연투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왔고 매년 200이닝은 기본이었어요. 그게 습관화되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지금은 170~180이닝만 던져도 많이 던졌다고들 하잖아요. 요즘은 거기에 맞게 체계적으로 훈련하다보니 연습 때도 몇 십개 안 던져요. 저희 때는 한 게임에서 200개씩 던지고도 그 다음날 또 던지는 게 다반사였고요.
김현석: 확실히 제2의 선동열이라고 부를 만한 선수는 아직 없는 것 같아요. 타격 기술이 상승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선 감독님의 기록은 역대 2위와 비교해봐도 압도적이잖아요. 윤석민, 김광현, 류현진 모두 잘하긴 해도 압도적이라는 느낌은 아니고요. 그리고 꾸준하지 않아요. 2~3년 잘 던지다가 부상당하는 경우도 있고. 놀라운 기량을 선보일 때마다 ‘제2의 선동열’이라고 명명되는 선수들은 많은데, 커리어를 마칠 무렵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 만약 영건 3인방- 윤석민, 김광현, 류현진- 이 꾸준히 제 기량을 발휘해준다면 ‘제2의 선동열’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무렵의 프로야구를 기억하게 하는 투수들로 남지 않을까 싶어요.
선동열: 그 세 선수에 더해서 롯데의 조정훈 선수도 가능성있는 투수라고 봐요. 다들 재능있는 어린 선수들이니까 앞으로 가능성은 충분하고요.
김현석: 선 감독님은 몸의 유연성도 좋으시잖아요. 주니치 입단할 때 호시노 감독이 선 감독님 손 보고 ‘좋은 투수다’라고 했던 기사가 기억나서 영화에도 그 대사를 넣었거든요.
선동열: 그렇죠. 제가 선수 시절에 딱히 부상으로 고생한 적이 없었어요. 유연성이 뛰어나면 부상이 없어요. 학생 때부터 저와 같은 시절에 활약했던 박노준(현 SBS 야구해설위원)도 몸이 부드럽지 않기 때문에 부상이 많았어요. 그래서 좋은 실력이 있어도 단명할 수밖에 없는 거고. 롱런하는 선수들을 보면 역시 몸이 부드러워요.
김현석: 유연성은 타고나는 것 아닌가요?
선동열: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본인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타고났어요. 그런데 본인이 훈련하면서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면 절대적으로 부드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던지고 치고 수비하는 훈련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몸의 유연성을 기르는 게 선수들에게는 꼭 필요해요.
김 감독님께서는 영화계의 소문난 야구광이신데요. 실제로 사회인 야구도 하시잖아요. 직접 선수로 뛰시면서 느낀 부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만.
김현석: 5년째 하고 있는데요. 실력이 안 늘어요. (웃음) 지난달에는 일본 후쿠오카 원정도 다녀왔어요. 그쪽 사회인 야구팀과 두 경기를 하고 왔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좋은 구장을 빌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면서 연방 사과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정도인가 해서 가 봤더니 세상에 사회인 야구 경기장이 구리에 있는 LG트윈스 2군 경기장 수준인 거예요. 위치가 산중턱이긴 했지만 너무 좋았어요. 거기서 나이트를 켜고 야간 경기를 한번 가졌고, 그 다음날은 더 누추한 곳으로 모시겠다고 또 사과를 해요. 그런데 거기도 우리나라의 웬만한 사회인 야구장보다 훨씬 훌륭했어요. 그 수준의 경기장이 일본 내에 엄청 많다더라고요. 너무 부러웠죠. 한국에서 사회인 야구 경기하려면 학교 운동장 빌려서 하거든요. 그나마 학교행사라도 있으면 일정이 연기되고 한강변 미사리쪽에 있는 정말 열악한 구장에서 경기하곤 해요. 그런 조항이 있대요. 한강변에서 축구는 해도 되지만 야구는 위험해서 안된다고.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야구의 인기가 부활하고 있는데 정작 야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선동열: 붐은 일어나는데 경기장이 없어서 야구를 못하니까 그게 참 안타까워요. 축구는 월드컵 이후에 좋은 경기장을 많이 지었잖아요. 그런데 야구장은 새로 지은 게 하나도 없어요. 82년에 프로야구 출범 이후로 시 소유의 운동장을 임대해서 쓰고 있는 거잖아요. 미국이나 일본 같은 야구 선진국에 비해 실력 차는 많이 줄었는데 유일하게 변화하지 않은 것이 야구장이에요. 가장 시급한 문제고요. 사실 광주, 대전, 대구 같은 지방 경기장은 팬들이 와서 볼 수 있는 시설이 아니에요. 여름에 영화관에 가면 에어컨 나오는 시설에서 편한 의자에 앉아 두 시간 동안 편하게 앉아서 보잖아요. 그런데 여름에 야구장에 가면 그 더운 날에 의자 좁지, 공간 좁지, 화장실 제대로 안되어 있지. 그런 곳에 팬들 보고 오라고 해서 세 시간, 네 시간 동안 야구 보라고 하는 것도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현석: 사회인 야구선수들이 진짜 열정적이거든요. 최고의 장비를 사는 데 돈 아까워하지 않아요. 장비들이 거의 프로 수준이에요. 은퇴한 야구선수들이 가르치는 사설 야구 강습 다니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래서 실력들도 상당해요. KBS의 이용철 야구해설위원(전 MBC 청룡, LG트윈스 투수 출신)도 함께 야구하는데요. 사회인 선수들이 그분 공도 쳐내요. 사회인 야구에서는 10점 차가 나면 콜드게임이 성립되니까, 7 대 0쯤으로 지고 있을 때 이용철 위원을 마운드로 올려요. 그러면 12 대 0으로 져요. (웃음) 저도 가끔 투수로 등판하는데 시속 70㎞ 나오려나? 사회인 야구에서 115㎞를 던지면 현역 시절 선 감독님의 150㎞ 직구 바로 그 느낌이거든요.
선동열: 그럼 아직까지 내가 던져도 되겠구먼.
김현석: 그럼요. (웃음)
김현석(1972년생)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졸업. 1995년 <사랑하기 좋은 날>의 시나리오작가로 영화계 입문했다. 이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시나리오에 참여했으며 2002년 <YMCA야구단>으로 연출 데뷔. 이후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스카우트>(2007)를 연출했으며 현재 <시라노 프로젝트>(2010) 촬영 중. 배우 엄지원이 구단주로 있는 사회인 야구단 ‘비광’의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선동열(1963년생) 고려대학교 졸업. 1980년 광주제일고 재학 중 대통령기 우승.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1985년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입단, 11년간의 국내 선수생활 동안 146승40패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역대 1위)의 대기록을 수립했다. 1996년 일본 프로야구팀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4년간 98세이브, 2.70의 평균자책점 기록. 현 삼성 라이온즈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