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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영화는 영화다워야 한다

<마이 제너레이션>과 <나는 곤경에 처했다!>를 영화적으로 비교해보면

<나는 곤경에 처했다!>

지난호 <씨네21>에 실린 김영진의 <나는 곤경에 처했다!>(이하 <곤경>) 평문(‘김영진의 점프 컷’)과 다른 견해를 말하기 위해 쓴다. 그는 호의적으로 썼고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김영진도 절찬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숭고나 고양, 반영, 아이러니의 느낌이 배어 있지 않”고 “홍상수 영화에서의 비약의 순간 같은 것이 없”지만, 이 영화는 “상당한 감각을 지닌 감독의 대사 구사력과 그 효과로 인해 발생하는 유머감각”과 “우리가 야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매어 있지 않은 태도로 인물과 상황을 만들어내는 재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흥미로운 세대의 기록”이다.

곰브리치가 미술을 두고 그렇게 말했듯이, 누군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데 잘못된 이유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김영진이 말한 위의 장점들은, “(주인공)이 어떤 기왕의 범주에도 묶이지 않는 인물의 개성을 보여준다”고 말한 대목을 뺀다면, 그 자체로는 대체로 동의할 만하다. 그런데 이런 장점들이 한 영화를 말하는 데 정말 의미있는, 적어도 주요하거나 우선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예컨대 TV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어떤 단편들이야말로 위의 찬사를 받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인물의 개성’이라면 ‘해리’쪽이 더 돋보이지 않는가.

공간적 입체감의 부족에서 오는 아쉬움

영화는 영화다워야 한다. 나는 이것이 비평의 자기 윤리라고 생각하며 이 점에 대해 더 많은 대화가 이뤄지기를 기대하며 쓰고 있다. 영화의 존재론과 연관된 논쟁적 주제인 ‘영화다움’ 혹은 ‘영화적인 것’의 초역사적인 절대 지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시대의 어떤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더 혹은 덜 영화적인지 말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인된 걸작이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은 부당할 테지만, 이를테면 김영진이 이 영화와 동류로 본 노동석의 <마이 제너레이션>(2004)과 비교해본다면 어떨까(두 영화 모두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생의 작품이며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상영작이라는 사소한 공통점이 있다. <곤경>은 뉴커런츠상을 받았고 <마이 제너레이션>은 받지 못했다는 사소한 차이도 있다). 김영진은 “젊은 세대의 일상적 리얼리티를 다룬다는 태도로 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내러티브와 스타일”이란 점에서 두 영화는 “기저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하며 “<곤경>쪽이 유머가 전경화돼 있다는 개성을 갖고 있다”고 썼다. 과연 그런가.

<마이 제너레이션>의 장점 중 하나는 공간 혹은 장소의 물질성에 대한 감각이다. 예컨대 여주인공 재경이 사채를 얻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는 세운상가의 어지러운 미로들은 어떤 상징이거나 환유이기 이전에 그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처럼 감지된다. 이 영화의 공간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능적 요소의 하나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동시대적 표정을 만들어내는 데 참여한다. 지금은 헐린 2000년대 초의 구세운상가가 없었다면 <마이 제너레이션>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병석의 월셋방에 사채업자의 하수인이 수돗물을 채우는 장면의 절박함은 반지하방이라는 공간의 물리적 성격과 그것의 사회경제적 위상에 대한 우리의 인지가 교차 작용한 효과다. 요컨대 <마이 제너레이션>의 공간들은 역사적 지정학적 장소로서의 면모가 더해져 두터운 입체감을 가진다.

반면 가난한 젊은 시인 선우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여러 소동 끝에 재회하는 <곤경>의 공간들은 대부분 이야기의 부속물이다. 다시 말해 기능은 있지만 표정이 없거나 빈약하다. 기능도 평면적이다. 최소한의 무대장치만 있는 연극으로 옮긴다 해도, 혹은 1950년대나 1960년대로 시간적 배경을 옮겨도 이 이야기는 거의 성립할 것이다(그렇다면 <곤경>이 좀더 보편적인 영화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있는 보편성을 획득했는지는 따져볼 문제이며 이것은 다시 말하겠다). 공간을 <마이 제너레이션>에서와 같이 다뤄야만 좋은 영화가 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마더>처럼 실제로는 완전히 동떨어진 장소들을 하나의 연속적 공간으로 포장하는 영화도 있으며, <도그빌>처럼 공간을 아예 추상화된 연극 무대처럼 꾸며 영화의 공간 감각을 성찰하는 영화도 있다. 다만 똑같이 빈곤한 제작 규모에도 <마이 제너레이션>의 공간이 영화적으로 훨씬 풍부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정작 동세대의 곤경에 대해 둔감한

또 다른 차이는 시선의 문제다. <마이 제너레이션>은 청년 병석과 애인 재경의 시선이 교차하고, <곤경>은 대체로 선우의 시선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전자가 두 사람의 이야기이고 후자가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사실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 시점 이동은 화자의 이동만이 아니라 관객 편에서 볼 때 육체적 응시의 교체를 포함하기 때문에 소설에서보다 훨씬 까다로운 기술적 문제가 된다. 시선이 교체될 때 발생하는 육체적 분열 혹은 비대칭과 불균형의 감각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통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대중영화가 복수의 화자를 거느리지만 대사건을 정점에 놓고 정보 중심의 신들을 배열함으로써 이 분열의 느낌을 감소시킨다. 하지만 두 영화처럼 일상적 사건이 나열되는 영화라면 응시 자체가 일종의 사건이 되면서 그 배열과 조합이 훨씬 어려워진다.

<마이 제너레이션>에서는 병석과 재경의 신들이 번갈아 배열되는 반면, <곤경>에서 선우의 애인 유나는 사건(다툼, 헤어짐, 재결합)을 위해서만 선우의 시선 안으로 초대된다. 이것은 선우와 정사를 나누는 ‘누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나와 ‘누나’가 응시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지만, 지속적인 객체로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의미있게 관찰되는 신은 전무하며, 오직 사건의 부속으로만 등장한다. 미디엄숏-롱테이크가 반 이상을 차지하는 <곤경>의 방식은 그 자체로서 선악의 문제룰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카메라가 시선의 방향과 지속,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에 대한 고민보다 상황과 대사 전달의 기능에 몰두할 때 영화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는 힘들다.

나는 <곤경>이 지금 나쁘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영화적으로 빈약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변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이 제너레이션>과 달리 <곤경>은 운용하는 영화적 요소들을 줄이고, 이야기에 전념한 영화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도 <곤경>을 지지하기는 힘들다. 먼저 김영진이 언급한 대로 두 영화를 모두 ‘세대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고 해서 그러하다. <마이 제너레이션>에서 병석과 재경의 곤경은 계급의 문제라기보다 세대의 문제다. 신용카드, 보험, 대출 따위를 경유해, 그의 형, 혹은 실장, 혹은 사장으로 대표되는 윗세대는 무언가를 자꾸 떠넘긴다. ‘나의 세대’는 자신이 쓴 것보다 항상 너무 많은 빚을 지고 그것은 점점 커져간다.

그러나 <곤경>은 막상 동세대의 곤경에 대해 둔감하다. 이는 병석이 영화감독 지망생이고, 선우가 시인이라는 설정에서부터 예감된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언제나 가난했다. 영화와 시라는 매체의 시대성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고민의 흔적도 다르다. <마이 제너레이션>의 병석은 마침내 카메라의 ‘끄기’ 버튼을 누름으로써 자신이 지닌 미디어의 진실성이라는 동시대적 문제를 숙고하지만, <곤경>의 시인은 자신의 시를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인은 가난할 뿐이라는 사실만을 반복해 강조한다.

영화적 야심을 가져라

그렇다면 <곤경>은 세대의 문제를 넘어선 좀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지향하는가. <곤경>의 이야기가 보편적이라는 건 맞다. 이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말한 ‘여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선우는 예술에 종사하지만 돈과 권력의 부재 때문에 불안해한다. 여자친구가 욕망하는(이라고 추정된) 사회적 남근을 그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결핍감이 이 이야기를 작동케 한다. 그러나 <곤경>은 이 보편적 질문을 자기의 질문으로 끌어안지 못한다. 그것은 추정된 ‘여자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을 질문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소년적 환상으로 후퇴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나가 그 남근 없이도 끊임없이 선우에게 돌아온다는 환상이 이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다방 아가씨를 멀리하려는 태도와 정사를 나눈 매력적인 ‘누나’를 끝내 거부하는 선우의 순정이 이 환상에 대한 응답이다. 그가 유나를 다시 만나 사시를 보겠다고 결심하는 것, 법전을 사러 간 헌책방에서 탈영병의 칼과 맞선 뒤에 다시 시를 쓰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그토록 간단히 이루어지는 건 최초의 질문이 환상의 재확인을 위한 핑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환상이 ‘시적인 것’이 아니라 한번도 말해지지 않은 ‘시’라는 텅 빈 기표 주위로 되돌아오는 건 당연한 결과다.

김영진은 “수습되지 않는 삶을 열심히 수습하려고 하는 강박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도 작은 해방”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수습되지 않는 삶’을 응시하는 순간을 발견하지 못했다. 성공이나 명예가 아니라 영화다움에의 추구에 관한 한 나는 이 감독에게, 야심을 가지기를 요청하고 있는 게 맞다. 하지만 존중받는 영화학교를 막 졸업하고 주류 영화계 밖에서 자신의 첫 작품을 찍은 젊은 감독에게 그 아닌 무엇을 요청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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