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몸이 아주 가까워져 마침내 나와 그의 거리가 0, 나아가 마이너스가 될 때 인간의 육체는 홀연 하나의 장소로 변모한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코를 묻은 아빠의 등은 너른 평원이고 최적의 자세로 포옹한 연인에게 서로의 품은 경건한 성당이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도입부에서 거대한 사막의 능선을 보여주는데, 잠시 뒤 변화한 카메라 앵글은 그 풍경이 여인의 벗은 몸이었음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상대의 몸을 극접사로 더듬는 이의 시각과 촉각에 감각된 연인의 겨드랑이는 어떤 바다의 그것보다 완벽한 곡선을 지닌 만(灣)이며, 쇄골에 팬 웅덩이는 애틋한 해협이다. 타인의 육체만이 아니다. 심한 통증이 엄습하면 우리는 갑자기 몸을 하나의 공간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자궁은 동굴이 되고 내장은 협곡이 된다. 격심한 감정은 혈관을 달리며 전신에 메아리친다. 영혼과 의식이 거주하는 우리 안의 차원없는 공간이 불현듯 실루엣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앤서니 곰리(1950~)는 인체의 형상을 띤 작품을 꾸준히 제작해온 조각가다. 인류학을 공부한 뒤 청년 시절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사숙했고 한때 승려의 길도 고려했다고 전해진다. 신장이 190cm에 이르는 곰리는 본인의 몸을 거푸집의 모델로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조상(彫像)을 만드는 일에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곰리가 흥미를 갖는 테마는 인간 육체 자체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이 점유한 공간의 성격이다. 요컨대 오브제가 아닌 장소로서의 육체, 몸이 머금고 있는 장(場)을 조형하는 작업이다.
런던 밀레니엄 돔 옆에 세워진 <양자구름>은 16mx10mx30m 크기의 대형 조각이다. 1.5m 길이로 절단된 철제 4면체들이 덩굴손처럼 얽혀 중심부에 이르면 20m 높이 인간의 형상으로 수렴되고, 가장자리는 대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작가는 이 작품의 영감을 “대수학은 관계들 사이의 관계”라고 정의한 양자물리학자 바질 힐리에게서 얻었다고 밝힌다. 조각의 실제 제작에도 카오스 이론과 프랙탈 구조가 이용됐다고 한다. 복잡하고 무궁한 갈등의 연쇄 속에 가까스로 정체를 드러내는 <양자구름>의 인간 형상은 자못 영웅적인 데가 있다. 가시덩굴에 갇힌 듯 고투하면서도 그는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앞이 보이지 않아 밀도와 자극만 감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느끼는 자아와 세계의 이미지가 흡사 이렇지 않을까.
앤서니 곰리의 작업은, 예술이 역사와 세계 속에 인간의 위치를 적시하는 ‘압핀’ 같은 것이라는 견해에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다. 다만 육체를 하나의 장소로 인식하고 나면 불가피하게 서늘한 각성이 잇따른다. 이 세계 어느 곳으로 도망치듯 우리는 결국 갈데없이 한곳에 머무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