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할 때 “뼈를 묻겠다”고 했다. 면접 당시 내 경쟁력은 그게 전부였다. 전근대적인 ‘돌쇠’ 발언이었지만, 어찌됐건 먹혀들었다. 그리고 <씨네21>에서 꼭 10년을 채웠다. 대책없는 오기만으로 버틴 것만은 아니다. ‘지겨워’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람들’ 만나는 재미에 힘을 낸 것 같다. 매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일기를 썼으면 어땠을까. 아쉽다. 지난 2달 동안 회사 안에서 ‘딴짓’을 좀 하면서 짬이 났는데, 과거 잡지에 실린 인터뷰를 뒤적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론 좀 끼적일 요량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 한명을 꼽자면 고 한운사 선생이다. 지난해 가을에 뵀는데(<씨네21> 671호, ‘전설의 시나리오작가를 만나다’), 올여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기사 작성을 위해 선생을 뵀던 건 세번이었다. 충무로국제영화제서 1번, 며칠 뒤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1번, 그리고 또 며칠 뒤 예술의전당에서 1번. 광화문에서 뵀을 때 선생은 젊은 사람이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며 ‘스테이크’를 골라줬다. 당신은 넘기기 편한 스파게티를 시켰다. 하지만 선생은 몇 가닥도 넘기지 못했다. 목이 불편하다며 그는 화장실을 두번이나 찾았고, 걷는 것도 쉽지 않은 선생의 구토 소리를 들으며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선생은 세상을 뜨기 전, 다섯번쯤 전화를 하셨다. 책을 몇권 보내달라고 한번, 친구들이 기사 잘 봤다는 연락을 해와 기뻤다며 한번, 지난번에 식사를 제대로 못했으니 명동에서 호프나 하자며 한번, 암 수술이 잘됐다며 한번, 선이라도 한번 볼 거냐고 한번. 올봄 선생의 전화가 유독 기억난다. “이군이랑 밥 먹을 때 힘들었는데 그 덕분에 검사를 받았고 수술을 잘했어.” 그때마다 난 극진하게 답했지만, 정작 선생과의 약속은 미루고 또 미뤘다.
선생을 생전에 한번 더 뵀다면 어땠을까. 선생은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윤주영 선생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분명 자리를 주선했을 것이다. 이럴 때 게으름은 죄악에 가깝다. 그때의 죄스러움 때문에 부음 기사도 내가 쓰겠다고 하지 못했다. 과거 썼던 기사를 보니 맨 마지막에 “더 오래 건필하시길”이라고 덧붙여져 있다. 진심을 담아 썼다고 믿었던 한줄이었지만, 돌아보니 그러지 못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어디에 있든지 많은 사람을 만날 텐데, 그때마다 선생과의 인연은 끈질기게 따라붙을 것 같다. 고마운 넋이고, 배려 넘치는 유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