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란 평생 늘 비슷비슷한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스트라빈스키나 피카소처럼 영역이 은근히 넓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예술가는 둘 중 하나다. 그냥 편안하게 자기 영역에 안주해 자기 반복을 계속하거나, 어색하게 영역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자기 영역으로 돌아오거나. <순풍산부인과> 이후 김병욱은 늘 후자였다. 그는 늘 처음에는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소방서를 무대로 한 직장 드라마가 되고 싶었다. <똑바로 살아라>는 노무현 캐릭터를 이용해 연예계 이야기를 넣고 싶었다.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서는 장르 패러디를 의도했다. <거침없이 하이킥>은 <위기의 주부들>식의 추리물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대부분 호랑이 가부장을 둔 대가족 코미디의 익숙한 형식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지 못하면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장르나 새로운 시청 환경에 대한 어떤 준비도 없이 무작정 시작했던 <거침없이 하이킥>은 가능성있는 캐릭터와 높은 시청률에도 중반 이후 무참하게 추락했다. 난 여전히 <귀엽거나 미치거나>가 조기 종영된 것에 대해 SBS에 원한을 품고 있지만 솔직히 지금 와서 보면 그 작품의 성공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김병욱 시트콤이 성공할 수 있는 영역은 여전히 그렇게 넓지 않다. 그 때문에 <거침없이 하이킥>은 종말의 징조처럼 보였다. 심지어 시리즈 후반에 가면 새로운 시도와 무관한 익숙한 김병욱 코미디도 더이상 힘이 없었다. 그것들은 반복의 반복에 불과했다. 김병욱이 김병욱 코미디를 만들 수 없다면 무엇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다행히 그의 신작 <지붕 뚫고 하이킥!>은 아직까지는 성공작이다. 그것은 김병욱이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말라버린 광맥을 대신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았기 때문은 아니다. 여전히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익숙한 김병욱 시트콤이고 그만큼 익숙한 김병욱 광맥에서 재료를 찾아낸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구성 요소 대부분은 재활용품의 콜라주다. 여기엔 늙은 가부장과 젊은 의사와 엉뚱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와 괴물 같은 아역 캐릭터, 섬세한 캐릭터 코미디와 종종 삽입되는 현실 세계의 드라마와 비극과 코미디가 타협없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깊은 감정들이 있다. 모두 김병욱이 지난 몇년 동안 죽어라 다루었던 것들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만들 때는 새로운 광맥처럼 보였던 것들은 어떤가? 이런 것의 재활용도 남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준혁은 <거침없이 하이킥>의 윤호에 물을 타 밍밍하게 만든 캐릭터다. 윤호처럼 작정하고 시리즈를 붕괴시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뭔가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 적당히 간만 보고 있는 러브라인 역시 아직까지는 <거침없이 하이킥> 때처럼 독소는 아니지만 이 역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세경과 정음에 대한 지훈과 준혁의 어장관리식 태도는 의미있는 심리묘사보다는 러브라인에 목을 매는 시청자를 자극하는 기계적 배분에 가깝다. 이런 러브라인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캐릭터에 제대로 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지적되어야 한다. <똑바로 살아라> 때라면 결코 이런 식의 캐릭터 낭비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새로 발굴한 요소들은 아직까지 독소가 제거된 제한적 조건 안에서 간신히 공존을 유지하고 있다.
새로 도입되어 시리즈의 기둥이 된 세경과 신애 자매의 이야기는 어떤가? 그들이 김병욱 세계에게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만한 새로운 공간을 제공해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광맥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모양이 조금 달라 보일지는 몰라도 이들은 처음부터 김병욱 세계의 일원이었다. 김병욱은 멀리 간 것이 아니다. 적도를 따라 무작정 가다가 아직까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그의 영토 반대편으로 돌아온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