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행복합니다>의 중요 등장인물 중 하나는 정신과의사 형철이다. 요즘 <남자의 자격>이란 버라이어티쇼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배우 김성민이 형철을 연기했다. 극중에서 형철이 과대망상에 빠진 만수를 치료하는 방법은 현실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도박에 빠져 결국 자살하고만 만수의 형의 사진을 보여주는가 하면, 만수의 어깨를 짓눌렀던 치매에 걸린 엄마를 대면시킨다. 몸이 먼저 잊을 것을 강요할 정도로 참혹했던 과거와 마주한 만수는 끝내 울고 만다.
영화를 보면서 형철은 윤종찬 감독이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했다(물론 원작인 <조만득씨>에 나오는 캐릭터다). <소름>과 <청연> 등 전작의 인물들은 언제나 벼랑 끝에 내몰렸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조국에 배척당했던 그들은 굴레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윤종찬 감독이 배우들 사이에서 가혹하기로 소문난 이유도 그에 기인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배우들의 가슴속을 집요하게 긁어냈고, 그때마다 배우들은 영화 속의 비극적 현실과 마주했다. 윤종찬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나는 행복합니다> 또한 고통의 강도에서는 만만치 않은 영화다. 윤종찬 감독이나, 그의 배우들이나 이번에도 상당히 힘겨운 시간을 겪었을 듯 보였다.
- 영화가 예상보다 늦게 개봉했다. 마음고생이 있었겠다. =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될 때만 해도 그해 11월에 개봉하려 했다. 1년을 보낸 데에는 저간의 사정이 있었겠지. 이 영화가 공개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했다. 다음 작품을 준비하면서 마음 편하게 지냈다.
- 고 이청준 작가의 <조만득씨>가 원작이다. 어떻게 만난 프로젝트였나. = <청연>을 끝내고 <로마 빵집의 휴일>이란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행이 안되던 차에 그 다음 작품을 같이 하기로 한 블루스톰의 배용국 대표가 원작을 제시한 거다.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가 눈에 들어오더라. 멜로적인 관계는 아닌데, 각색을 통해 충분히 영화적인 아이러니를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간호사 수경은 원작과 가장 많이 달라진 부분이다. 원작에서 미스 윤으로 불리는 간호사는 비판적 관찰자 시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거의 만수와 동급인 인물이다. 만수의 과거와 수경의 현재는 거의 데칼코마니처럼 편집됐다. 만수처럼 퍽퍽하게 살고 있는 수경이 곧 만수처럼 되어버리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 원작에서는 과대망상에 빠져 행복한 사람을 치료하는 게 진정한 치료일까란 질문이 중요하다.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동시대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다른 작품에서도 다뤄진 내용이고. 수경의 현재를 다시 만든 이유다. 방금 말한 대로 둘을 대치시키면서 미친 사람이나 안 미친 사람이나 삶이 버겁기는 마찬가지란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싶었다.
- 생전의 이청준 작가를 만났나. = 난 전혀 몰랐는데, 옆 단지 아파트에 살고 계시더라. (웃음) 제작자가 선생님 만나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대충 위치를 들어보니 우리 동네였다. 내가 104동에 사는데, 선생님은 122동에 사시더라고. 아, 임권택 감독님이 바로 그 옆 123동에 사신다. (웃음) 내가 여쭤본 건 소설의 결말에 대한 거였다. 병원을 나온 조만득이 결국 어머니와 동생을 죽이는데, 영화화화려는 입장에서는 암담했다. 선생님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쓴 거라며 어떤 메타포로 설정한 부분이 아니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을 해보니 소설과 영화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 같다며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후에 각색을 하면서 엔딩 부분은 판타지적인 상황으로 그려보려 했었다. 그런데 제작여건상 쉽지 않더라.
- 어떤 판타지였나. = 지금 버전에서도 만수가 다른 환자에게 비트박스를 배운다. 원래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마지막 부분에 만수가 폭발하면서 랩과 비트박스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때 판타지로 넘어가면서 그의 어머니와 형이 함께 노래를 하고 돈을 뿌리는 게 나온다. 병원 환자들은 정장을 차려입고 바닷가재 같은 좋은 음식을 먹는데, 의사들이 서빙을 하고. 그러다 꿈에서 깨는 거다. 제작비 문제도 있었지만, 젊은 배우를 데리고 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소름>을 만들 당시였다면 원작의 결말도 영화에 담지 않았을까 싶다. = 그랬을 수도 있다. (웃음) 여담인데, <소름>을 만들고 나면 굉장히 시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더 갑갑하더라. 영화적으로 유연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했었다. <나는 행복합니다>를 구상할 때도, 좀더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 미국에서 만든 단편영화들도 그렇고, ‘기억’이란 주제는 빼놓지 않는 것 같다. =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에 더 눈길이 가는 건 사실이다. (웃음) 계속 가져가면서도 벗어나려고 하는데, 워낙 집중이 잘되는 소재다.
- 가족이란 굴레도 빼놓지 않는 설정이다. 특히 아버지란 존재는 가장 강력한 숙명적인 굴레로 등장했다. = 글쎄, 부모님이 일찍 이혼을 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살아선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대가족의 풍경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다 보니 영화에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행복합니다>에서는 조금 다른 태도로 가족을 바라봤다. 가족문제라기보다는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문제가 지금도 현실에서 꽤 큰 걸림돌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일단 부모를 봉양하는 것에는 돈문제가 엮여 있지 않나. 그리고 극중 수경의 아버지처럼 질병도 큰 고통인데, 이 역시 돈문제로 귀결된다. 각색할 때, 지금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미치도록 괴로워할까 생각했는데, 이런 문제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이 적어도 한두 가지 문제에서 공감을 느낄 것 같다.
- 그렇게 볼 때 왜 만수와 수경은 그 스트레스를 견디고만 있나 싶기도 하다. 둘 다 20대 중·후반 남녀인데, 지금 시대라면 미쳐버리기 전에 그런 굴레를 아예 벗어던지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는 그 부분에 대해 특별히 설명하지 않는다. = 동시대성에서 좀 벗어난 부분인 건 맞다. 만수는 캐릭터를 설정할 때 좀 오버했다. 요즘에는 존재하지 않은 미련곰탱이 같은 20대지. 아마 요즘 20대가 미친다면 아예 다른 이유일 거다. 돈문제를 겪기는 하겠지만, 그게 가족 때문인 경우는 별로 없겠지. 또 현빈이라는 배우가 가진 모던한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더라. 다른 설정을 하기가 어려웠다. 감독 입장에서 작품의 톤을 맞추기가 힘들었던 부분이다.
- 감독의 스타일을 봐서는 원래부터 로맨스가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현빈과 이보영이 캐스팅된 뒤로는 고민해보지 않았나. = 내가 애써서 그리지 않아도 로맨스적인 분위기가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는 사람이 일부러라도 느끼지 않을까. (웃음) 나름 가장 강하게 준 남녀의 교감은 만수가 아버지 치료비에 쓰라고 수경에게 종이돈을 주는 장면이었다. 내 구상에서는 수경이 독방에 묶여 있는 만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중요했다. 그 장면은 저 사람과 내가 다른 게 뭔가, 병원 안과 밖에 있을 뿐이지 삶에서 다른 게 없다는 시각이다. 물론 혹자는 좀더 멜랑콜리한 부분을 넣자고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면 주객이 전도된 상항이 되겠더라.
- 혹시 수경 역에 장진영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나. = 지금까지 내가 쓴 시나리오 중에 처음으로 진영이에게 주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그전에는 영화가 되든, 안되든 시나리오가 나오면 제일 먼저 보여줬다. 하지만 수경의 이미지에서 봤을 때, 진영이가 연기하면 <소름>의 느낌이 나올 것 같더라. 자칫하면 내가 진영이를 10년 전으로 퇴행시킬 것 같았다. 그래서 진영이가 좀 많이 섭섭해했다. 그래도 촬영장에 와서 스탭들 회식도 시켜주고 하룻밤 자고 갔었다.
- 인연의 배우라는 측면에서 극중 만수의 형을 연기한 배우 이찬영과의 인연도 궁금했다. <소름>에서는 용현의 친구로 나왔고, <청연>에서는 조선적색단 김상수를 연기했다. <나는 행복합니다>까지 부른 걸 보면, 그에게 남다른 애정이 있을 것 같더라. =하하, 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그를 처음 만난 게 <소름> 때였는데, 그때 모든 배우들이 쑥대밭이 됐었다. 뭐냐하면, 배우들이 대사를 다 외우고 혼자서 연기할 때는 잘해놓고도 나만 나타나면 벌벌 떠는 거다. 데뷔작이었으니 얼마나 세게 밀어붙였겠나. 다들 나를 악마로 봤다. (좌중 폭소) 이 작가를 연기한 기주봉 선배까지도 그러셨다. 엄청난 베테랑이시지 않나. 그런데 어떤 인터뷰를 보니까 “꿈에 윤종찬 감독이 나타난다”면서 “그 사람 앞에 가면 대사를 까먹는다”고 하셨더라. 기주봉 선배 혼자 필름 3만자를 쓰셨다. <소름>을 촬영한 전체 필름이 13만자였는데…. (웃음)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찬영이가 왔는데, 내가 세 테이크를 찍고 오케이했다. 스탭들이 막 웅성웅성하더라고. (웃음) 감독으로서는 상당히 고마웠다. 오는 배우마다 카메라가 돌면 긴장한 호흡이 들릴 정도였는데, 나도 스트레스를 받던 차에 그렇게 후다닥 하는 배우가 오니까 좋았던 거다. <청연> 때는 일본어 대사가 많아서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 그래서 더욱 찬영이를 데리고 하면 편하게 찍겠다 싶었던 거지. 이번 영화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 맡긴 거였다.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떠는 일은 나로서는 항상 겪는 고민이다. 다른 건 괜찮은데, 떨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 윤종찬의 연기연출 스타일은 정평이 나 있다. 현빈도 속상할 때가 많았다고 하더라. = 빈이도 마음고생을 했을 거다. 처음에 빈이는 자기가 평소하던 대로 현장을 대했다. 현장에 오면 인사하고 바로 밴에 들어가 있다가 조감독이 준비 다 됐다고 하면 그때 나와서 연기하는 식으로. 그런데 나는 준비 끝내고 모시러 가는 배우는 자신의 연기에나 영화에나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두어번을 그렇게 찍었는데, 나중에 불러서 넌 뭐하러 여기 온 거냐고 야단을 쳤다. 빈이로서는 당황했을 거다. 자신도 모를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내 옆에 앉아서 모니터 보고, 스탭들 준비하는 것도 보고, 어떤 사이즈로 연기해야 하는지도 물어보라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모니터를 세심하게 보더라. 그렇게 4주를 찍었는데, 나중에는 진짜 만수처럼 몰골이 변했다. 그 이후로는 동네도 막 돌아다니고 길거리에서 밥도 먹더라. 그곳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 영화를 보면 이보영에게도 상당히 가혹했을 것 같더라. 특히 죽은 아버지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흐느끼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진이 빠졌다. = 보영이한테는 더 혹독했던 것 같다. 현장에 의자도 없었다. 스탭들이 있는데, 심한 말도 했었다. 나중에는 소속사 사장이 서울에서 통닭을 사들고 와서 “보영씨는 방송국 가면 국장급이 커피 타줄 정도의 배우인데,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만 배려해달라”고 하더라. 그런 식으로 매니지먼트하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그런 관리가 배우를 망치는 것처럼 보이더라.
- 결과적으로는 현빈이나 이보영이나 이전 작품과는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감독의 그런 스타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다. = 만약 감독이 권위로 밀어붙이면 안 받아들일 거다. 예를 들어, 감독인 나도 추운데 나와서 고생하는 데, 너는 뭐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건 안된다. 인신모독적으로 야단을 쳐도 참는 배우들이 없을 거다. 대신 작품을 위해서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얘기하면 배우로서는 화가 나도 참는다. 화를 곱씹어서 자신의 연기를 다시 보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 준비하는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 <로마 빵집의 휴일>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 준비 중인 건 <모나코>(가제)란 영화인데, 누아르다. 사실 데뷔할 때도 누아르를 준비했었다. 지방에 살고 있는 세명의 건달이 서울에서 출세한 선배의 부름을 받고 올라왔다가 벌어지는 일이다. 선배에게 어떤 일을 받게 됐는데, 알고봤더니 상당히 엄청난 일인 거지. 누아르와 멜로의 분위기를 담아낼 생각인데, 멋있는 깡패를 그리거나 그들의 삶에 의미를 두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 한때 <씨네21>의 부탁으로 허진호, 김지운 감독과의 대담에 나선 적이 있었다. 혹시 다시 대담을 한다고 했을 때, 흥미로운 감독이 있나. 개인적으로는 이창동 감독과의 대담이 보고 싶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했다는 건 둘째치고, 두 감독 모두 고통을 다룬다는 점에서 할 얘기가 있을 것 같다. = 사실 지난 몇년간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밀양>도 아직 못 봤다. 요즘 들어서 많이 보려고 하는 편이다. 글쎄, 영화를 좀더 봐야 말할 수 있는 질문이다. 어떤 감독들은 시사회도 찾아다니는데, 나는 좀 게으른 편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