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뢰진, <우주여행 07>, 32x23x86, 대리석, 2007
조각의 정석 지수 ★★★★ 조각의 해체 지수 ★★★★★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가장 피해가 막심했던 예술 장르는 무엇일까. 추측건대 그건 바로 조각이다. 해체와 파괴, 기존 미술의 뒤집기를 선호한 포스트 왕국에 조각이란 제작 방식은 독이었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고? 회화는 재료와 화풍을 달리하면 그만이었다. 미디어 아트?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두주자 아닌가. 장소와 이동이 자유로운 설치미술은 회화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유행했다. 조각은 이들 장르의 장점 중 어느 것도 가지지 못했다. 재료와 제작 방식이 한정되어 있으며, 형태가 고전적이라 파격을 꾀하기가 어려웠다. 포스트란 이름 아래 조각이 그 위세를 널리 떨치지 못했던 이유다.
포스트 모더니즘 그 이후를 바라보는 지금, 조각의 과거와 미래를 성찰하는 두 가지 전시가 눈에 띈다. 재밌는 것은 주제와 지향점이 전혀 다른 이 두 전시가 같은 미술관의 두 분관에서 열린다는 점이다. 먼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열리는 <조각 읽는 즐거움전>은 조각의 과거를 얘기한다. 한국 조각의 기반을 다진 선배 작가 21명의 작품 27점을 전시하는 자리다. 인물의 미묘한 표정, 가느다란 근육까지 놓치지 않고 재현한 백문기 작가의 <An Idea>는 그야말로 클래식. 조각의 기본 법칙 내에서 안정적인 변화를 꾀한 최종태(<앉아있는 여인>), 전뢰진(<우주여행 07>) 작가의 작품은 편안함을 선사한다. 고등학교 미술책에 수록됐다는 이 두 작가의 작품을 보면 찰흙이나 연한 나무토막을 제멋대로 깎아내던 학창 시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오귀원, <공든탑>, 80x80x220, 나무에 아크릴, 금박, 2008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는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전>은 포스트 모던 시대 조각의 활로를 모색하는 전시로, 22명 작가의 조각 50점이 소개된다. 이 전시는 조각의 근본 요소에 세 가지 방식으로 테러를 가한다. 첫 번째 테러 대상은 ‘중력’. 조각을 지탱하는 이 힘에 도전하는 작가들은 조각을 매달고, 눕히고, 누르고, 해체하며 저항한다. 추에 케이블선을 달고 철을 이어 벽에 고정시킨 전강옥의 <매달린 큐브>가 대표작. 천영미, 오귀원 등 조각의 변하지 않는 물질성에 도전장을 내민 작가도 있다. 이들은 조각의 소재로 종이, 비누, 크레용 등을 사용해 바스러지고 마모되는 조각을 만든다. 가장 독특한 건 세 번째 저항인데, 이 유형의 작가들은 공기, 빛, 물, 진동도 조각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 스타일과 정서만으로도 조각이 될 수 있다나 뭐라나. 최종운(<It’s so sad>) 작가나 오니시 야수아키(<Untitled>)가 이같은 낭만파 조각가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