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영화는 역시 뉴욕 길거리에서 끝도 없이 떠드는 ‘수다의 맛’이다.
<멜린다 멜린다> 이후 4년 넘게 유럽을 헤매다 다시 돌아온 뉴욕에서 이번엔 염세적 절망을 지혜로 위장한 채 사는 고집불통 노인을 만들었다. <왓에버 웍스>(Whatever Works, 2009)에서 보리스(래리 데이비드)는 말발, 글발 끝내주는 교수였지만 불만과 불안으로 똘똘 뭉친 나머지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못한다. 자살을 시도해도 하필이면 남의 지붕 차양막으로 떨어져 죽지도 못한 채 평생 다리를 절뚝이게 되고 인생의 대부분을 카페에서 남의 탓, 세상 탓을 하는 데 쓴다. 걸핏하면 화면 밖 관객에게까지 대화를 시도하는(거기 팝콘 드시는 분 말입니다, 식의 화면을 초월한 대사는 한때 우디 앨런 영화에서 종종 보였다) 보리스는 보면 볼수록 우디 앨런의 도플 갱어다.
팥죽색 면 티셔츠와 체크 반바지를 입고 점퍼를 걸치는(버튼다운 셔츠와 치노 팬츠는 아니지만) ‘아메리칸 캐주얼’의 전형적인 스타일. 게다가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어도 어정쩡한 길이의 양말은 꼭 챙겨 신는 괴상한 청결주의까지 딱 우디 앨런이다. 집에서는 재즈와 클래식을 듣고 프레드 아스테어 영화를 좋아하며 결정적으로 건강염려증 환자라는 것 역시. “병원에서 궤양을 못 찾았을 뿐 궤양이 없는 건 아냐. 어제도 궤양 때문에 죽을 뻔했어”라고 불안해하고, 손을 씻는 동안 생일 축하 노래를 꼭 두번 불러야 세균이 완전히 박멸된다는 보리스를 보면 <애니홀>의 앨비싱어, 우디 앨런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영화는 늘 그렇듯 우디 앨런식의 아무 쓸모도 없는 수다 사이에 그의 진심을 슬쩍 넣어둔다. 종교와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불만. 그러나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 때문에 그 얘기들이 심각하거나 무겁진 않다. 보리스가 뉴욕 차이나타운의 식당과 가게들, 동네 카페, 벼룩시장을 온종일 걸어다니며 수다를 떠는 통에 동네 구경 한번 잘하게 되는 것도 <왓에버 웍스>의 또 다른 재미다.
보리스 역할을 맡은 래리 데이비드는 유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긴 세월 갈고닦은 내공 때문인지 누가 봐도 ‘우디 앨런’인 역할에서도 자기 캐릭터를 잃지 않는다. 대머리이지만 양쪽 귀 위만 풍성한 헤어스타일까지 똑 닮았지만 그는 ‘우디 앨런’이 아닌 래리 데이비드의 ‘보리스’를 연기한다. 어쩌면 네모난 검정 뿔테가 아닌 동그란 스틸안경 때문일까? 아마 보리스가 검정 뿔테 안경을 낀 괴팍한 노인이었다면 오히려 어색한 우디 앨런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저럴 바엔 직접 출연하지?” 소리가 나왔을 수도 있고.
우디 앨런은 래리 데이비드의 보리스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은 따로 이 영화에 출연한다. 늘 입는 옷에 익숙한 그 안경을 낀 채로. 딱 3초 정도 나오니까 눈에 불을 켜고 봐야 찾을 수 있다. 참, 주인공 이름인 보리스는 우디 앨런의 단편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