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옥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파주>는 무척 예민한 영화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예민하게 전개되는 영화는 근래 본 적이 없다. 평일 오전에 <파주>를 상영하는 극장의 객석은 한산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여대생인 듯한 두 젊은 여자가 깔깔거리며 자기들끼리 영화 본 소감을 말했다. “무슨 얘기래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다나봐. 영화제 관객이나 이해할 거야.” 갑자기 영화 속의 두 주인공의 운명과 영화 바깥의 무심한 태도가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파주>는 간단한 것 같지만 간단하지 않은 스토리다. 형부와 처제의 펼쳐지지 못한 사랑이 소재지만 멜로드라마 화법이 아니다. 서우가 연기하는 은모는 형부 중식을 속으로 연모하며 아마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은모는 한번도 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동안 형부와 결혼했던 언니는 집안의 가스 폭발사고로 죽었고 가출 뒤에 돌아온 집에서 은모는 형부와 함께 산다. 사회운동가인 형부 중식은 은모가 수능시험을 볼 무렵 경찰에 잡혀간다. 은모는 형부가 준 대학등록금으로 장기간의 인도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다. 은모가 몇년 만에 고향에 왔을 때 그곳은 재개발로 어수선하다. 은모의 형부 중식은 재개발철거대책위원회 리더로서 철거현장에서 투쟁을 지휘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다시 시작될 듯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서로 감정을 발설하기 힘들다.
멜로의 외연을 확장하는 공간성에 놀라다
<파주>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조금씩 우연으로 저질러진 잘못들로 인해 남녀 주인공의 죄책감이 쌓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우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중식의 8년 전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그 뒤에도 중식과 서우의 과거를 보여주는 회상장면이 거칠게 끼어든다. 한 템포씩 늦게 서우와 중식의 과거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입 템포도 조금씩 늦어진다. 영화가 끝난 뒤 이 영화의 비연대기적 구성이 합당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이미 상처를 받아 할퀴어진 그들의 내면을 충분히 지켜본 다음에야 우리는 그 상처의 기원들을 본다. 그것이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의 예의로 합당해 보였다.
중식과 은모 두 사람은 모두 자의가 아닌 실수를 저지른다. 중식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누군가가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죄의식 때문에 남은 삶 동안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쪽을 택한다. 은모는 자기의 실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걸 알고 있는 중식이 끝까지 그걸 감춰주기 때문이다. 언니의 사고사와 관련해서 은모가 뭔가 미심쩍은 구석을 눈치채고 캐러다닐 때 관객도 덩달아 중식에게 의심을 품지만 사태의 전말이 곧 밝혀진 뒤에는 이들의 불우한 운명에 망연자실하게 된다. 처음부터 서로 좋아했으면서도 불륜의 중압감 때문에 끝내 감정에 솔직할 수 없었던 중식과 은모의 불행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 외상을 감싸는 그들의 삶의 전반적인 환경은 사회적인 것이다. 삶에 불가항력적으로 닥치는 불행의 무게에 관해 <파주>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들이대며 파고든다. 운동권으로 활동했던 중식의 이력은 그 상처의 핵심이고 현재의 삶에 침입하는 도시 재개발의 폭력성도 이들의 고독을 더욱 개별화한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드는 스토리에 대한 취향은 박찬옥에게 진한 것인가 보다. 그의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유형에 속한 스토리다.
이 영화 <파주>에서 놀라운 것은 그런 멜로드라마적 소재의 외연을 확장하는 공간성이 놀라울 만큼 진득하게 재현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의 재능으로 이만한 것 이상을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 만큼 <파주>는 인물의 심상과 공간의 외형을 딱 붙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영화 첫 장면부터 진득하게 배어 있는 안개의 풍경은 남녀 주인공에게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모호한 불운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안개는 이 영화에서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주요 시각 모티브인데 자연스럽게 배경에 어른거리면서 인물들에게 서려 있는 상처의 촉진제 같은 기능을 한다. 영화 중반, 용역깡패들이 중장비를 앞세워 철거대책위원회 사람들이 농성하는 건물을 때려 부수는 장면의 압도적인 이미지는 남녀 주인공의 고독을 겹으로 아프게 만든다. 그들의 운명에 세인들이 무심한 것처럼 그들 주변의 철거민들에 대해서도 세인들은 무심하다. 결국에는 이렇게 서로 무심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각자 처절하게 고독에 마모되며 다친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상투적이지 않게 희망을 포섭하는 태도
나는 박찬옥이라는 감독이 잔인한 세상과 운명의 법칙 앞에 굴복하지 않는 주인공들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존경스러웠다. 그는 이들의 감정을 관객 앞에서 착취하지 않으며 이들이 조용히 견디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은모 역의 배우 서우의 외모는 압도적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친구의 스쿠터를 타고 고향을 떠날 때 짓는 표정은, 굉장히 예민하게 맞춘 카메라 앵글과 부합하며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중식은 끝내 그녀의 우발적인 죄를 세상에 발설하지 않았다. 철거대책위 활동으로 유치장에 간 중식을 면회온 형에게 중식은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길 잃어버린 양’을 위하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해 비밀을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봉인된 비밀의 당사자인 은모는 언니가 죽었을 때도 형부가 잡혀갔을 때도 고향을 떠나버린 철부지 젊은이처럼 주변 이웃들에게 비쳐지지만 실은 누구보다 시련을 스스로 견디어내며 버티는 강인한 젊은이다.
보호받지 못하는 남녀 주인공의 고독감, 억세게 운 나쁜 세상의 질서에 따라 망가지지만 물끄러미 그런 자신의 운명들을 견디는 상황을 보여주는 듯한 카메라는 <파주>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뿜는다. 고통이 진짜로 심할 때 우리는 말하기조차 힘든 것임을 안다. 그런 지독한 고통을 현시하는 영화적 방법으로 박찬옥은 인물의 얼굴과 제스처, 풍경의 무심한 배열을 택했다. 과묵하지만 진실하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현명해질 수 있을까, 라고 의심되는 세상이지만 중식과 은모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나이를 먹어간다. 절대적으로 개별화된 그들의 고독에 대하여 중식은 어른스런 방식으로, 은모는 조용히 혼자 견디는 방식으로 버틴다. 사회운동가인 중식은 연대라는 형태로, 은모는 고독이라는 형태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당하지만 그들 모두 절해고도에 갇힌 심정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파주>는 우리가 희미하게 감촉할 수 있는 인간적 교류의 끈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경영이 연기하는 나이트클럽 사장, 개발사업의 막후 지휘자인 그에게 부여된 이상하게 인간적인 모습이나 은모의 단짝 친구가 보여주는 헌신적인 우정은 중식의 운동권 선배이자 연인, 철대위에서 함께 싸우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던 어떤 희망을 갖게 한다. 박찬옥의 비전형적인 시선의 독창성은 바로 이런 데 있는 게 아닐까.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아우르면서도 상투적이지 않게 희망을 포섭하는 태도가 그의 영화의 주인공들에게서도, 그들의 주변 인물들에게서도 느껴진다.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도, 포기하는 것에도 다 대가가 따른다. 그걸 아는 사람들에게서만 희망의 흔적을 나눌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파주>는 모처럼 보는 성숙한 예술가의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