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영, 셋 세명의 대통령을 보았다. 한 사람은 그냥 ‘척’만 하려던 행사에서 별안간 복권이 1등에 당첨되어 그걸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사회에 기부한다. 한 사람은 젊고 멋진 대통령인데 아픈 아저씨 때문에 신장이 필요하다는 청년을 위해 정말 신장 한쪽을 떼어준다. 또 한 사람은 여성 대통령인데 순진한 학자이지만 사고뭉치인 남편 때문에 이래저래 속을 썩이지만 부부애라는 가장 가까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장진의 <굿모닝 프레지던트>에 나오는 세명의 대통령이다. 어느 날 오후에 이 영화를 보았고 대책없이 싫었다.
나는 지금 이유를 찾아 나쁘다고 말하는 대신 대책없이 싫다고 말하는 쪽을 택했다.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때에 나왔다 해도 이 영화가 지금처럼 싫었을까. 아마도 덜 싫었겠지만, 대통령이 착하고 서민적이라는 이 순진한 상상에 대한 판단은 누가 대통령이냐는 정권의 시기와 사실 상관이 없을 것이다. 마침내 일익에의 유혹을 떨치고 사회복지에 힘쓰는(첫 번째 대통령), 민족애에 불타지만 서민의 신장 하나에 먼저 신경을 쓰는(두 번째 대통령), 공적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한다 해도 사적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세 번째 대통령), 이 세 사람은 그 언제라도 기대하기 어려운 이상적 모델이다. 그런데 영화는 종종 그들의 애환을 핑계로 우리에게 이상적 모델에 대한 거국적 믿음을 계몽하려 든다. 이 영화의 싫은 점은 발랄한 상상이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계몽이다. 대통령의 난관이 대통령의 이상적 능력에 결부되어 보이도록 계몽하고 있다.
이번주 영화읽기에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비판론을 쓴 황진미씨는 이 영화를 “이명박의 변신론”이라고 칭했는데, 재미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허경영, 셋에 관한 이야기이며 ‘허경영의 이상화론’이다. 결국 지금의 대통령도 국민을 ‘이상적으로’ 안아주기 위해 그토록 현실적으로 애쓰는 것 아니던가! 눈만 보고 있어도 병을 고쳐준다는 허경영의 능력이 정말 사실이라면 한표를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내 등허리 오른쪽의 이유없는 통증을 없애줄 것이고 어쩌면 좀더 자비롭게 나를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글쓸 수 있게 하거나 칼 드레이어처럼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신비로운 능력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