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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룡 10주기] 모범답안의 위선을 연기하다
권병길(영화배우) 2009-11-17

10년 전에 떠난 대배우 최무룡을 향한 후배 권병길의 사랑가

오는 11월13일은 배우 최무룡이 눈을 감은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한달 앞둔 지난 10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던 양 실장을 연기했고,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극중 손예진을 치료하던 의사를 연기한 배우 권병길의 전화였다. 그는 외국의 배우는 추억하면서도 한국영화사에서 오랫동안 기억돼야 할 배우에게 주목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씨네21>은 최무룡의 오랜 팬이라는 그에게 글을 부탁했고, 그는 글과 한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다음의 글은 최무룡의 연기와 삶을 담은 기록이자, 한 배우를 사랑한 또 다른 배우의 고백록이다.

60년대 은막의 별든. 선글라스 낀 맨 왼쪽부터 김진규, 최무룡, 김지미.

어린 시절, 옆 동네 대천해수욕장에서는 해마다 ‘바다의 여왕’ 선발대회가 열렸다. 그해 피서객을 대상으로 한 미인대회쯤 되는 행사다. 사진을 좋아하던 권병홍 형님은 해마다 대천을 찾아 사진을 찍곤 하셨다. 김진규와 최무룡, 김지미가 함께 찍힌 이 사진도 어느 해인가 열렸던 선발대회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마도 이들은 심사위원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종종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지금은 돌아가신 형님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음 한켠에서는 사라져간 60년대 은막의 별들을 그리워한다. 사진 속의 세 배우 가운데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그들을 그리워할수록 젊은 영화들이 도외시한 순수함과 클래식한 매력을 지닌 당시의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최무룡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영원한 스타였고, 그의 작품은 나에게 소중한 기억이다.

한국 최초로 무대에서 햄릿 연기

최무룡은 1928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개성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들어간 그는 재학 시절 연극에 심취했다. 그 당시 그가 출연한 연극 중 한국 연극사의 기록이 된 작품이 <햄릿>이다. 이해랑이 연출한 이 작품에서 그는 한국 최초로 햄릿을 연기했다. 그에게는 햄릿을 무난하게 잘 연기했다는 평가가 따랐다. 배우 최무룡의 본격적인 연기인생이 열린 것도 이 무렵이다. 극단 신협 단원들과 함께 지방순회공연을 하면서 연기력을 쌓은 그는 이만흥 감독의 <탁류>(1953)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언제나 연극배우 출신이란 타이틀이 따라다녔다. 물론 그의 연기력을 평가할 때 쓰던 수식이었다.

최무룡의 존재감을 알린 건 김기영 감독의 <주검의 상자>(1955)였다. 배우 강효실(최민수의 모친)과 함께 출연한 이 작품으로 그는 샤프한 용모와 사색하는 분위기의 스타로 거듭났다. 이후 한국영화계는 그의 시대였다. 신상옥 감독의 <젊은 그들>(1956),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 권영순 감독의 <가는 봄 오는 봄>, 홍성기 감독의 <별은 창너머로>(1959), 엄심호 감독의 <이별의 부산정거장>(1959), 전창근 감독의 <이국정원>, 신경균 감독의 <울지 않으련다>(1959), 이병일 감독의 <청춘일기>(1959) 등 해가 갈수록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50년대 말까지 최무룡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스타였다.

<제삼지대>

<청춘일기>

흔히 최무룡의 연기는 센티멘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섬세하고 잔잔하게 호소하는, 리듬이 있는 대사와 세련된 화술, 무엇보다 그는 말없이 눈으로 연기하는 배우였다. 감정을 이기지 못할 때는 무너지는 젊은 지성의 분위기를 풍겼다. 배우 이순재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최무룡을 이야기하면서 맑은 음성과 타고난 체구, 그리고 정확한 대사와 작품분석 능력을 그의 강점으로 꼽았다. 그런가 하면 감독 김수용은 그에 대해 배역에 따라 호흡의 완급을 조절하는 기술이 능하고 감정의 절제력이 뛰어나며 몸 전체로 하는 내적 연기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최무룡의 작품들이 대부분 전쟁 뒤 좌절을 겪는 젊은 초상이었던 것도 그의 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영균·김진규와 달랐던 반항적 모습

조미령, 이민과 함께 출연한 박영환 감독의 <이별의 종착역>(1960)에서 연기한 준호도 전쟁의 상처를 겪는 남자였다. 준호는 군대에 징집되면서 애인인 영주(조미령)와 헤어진다. 얼마 뒤 영주가 받는 건 준호의 전사통지서다. 하지만 준호는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그 사이 영주는 준호의 상사인 경식(이민)과 결혼을 약속했다. 어느 날, 경식의 초대로 집을 방문한 그는 그곳에서 남의 여자가 된 연인과 만난다. 하늘이 무너진 표정에 이어 경식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최무룡의 절절한 연기가 품어나온다. 비에 젖어 김이 서린 창을 바라보며 최무룡은 말한다. “도대체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준호가 느꼈을 허허로운 감정이 그의 섬세한 연기에 닿아 빛났다.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1965)에서도 최무룡은 절묘한 연기의 반전을 보여준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북한 인민군 소좌 장일구를 연기한 신영균의 독무대다. 극중에서 장일구는 북에서 애인을 찾아 휴전선을 넘었다. 신영균은 에너지가 넘치는 연기로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최무룡이 연기한 이 대위는 바로 장일구의 애인 고은아(엄앵란)의 현재 남편이다. 은아를 만난 장일구는 이제 마음의 정리를 한다. 하지만 이 대위는 고은아와 결혼하기 전 북에 간 애인이 나타나면 자신이 떠나기로 했다는 약속을 전한다. 지키고 싶지 않았던 약속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 이때부터는 최무룡의 독무대다. 신영균의 연기스타일과는 다른 그의 나직한 목소리와 섬세한 표정연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배우의 연기가 더욱 풍부한 감정을 전했던 작품이다.

신영균과의 대결에서 보듯 최무룡은 당시 다른 남자배우들 속에서도 이질적인 기질을 가진 배우였다. 최무룡의 초기작품인 박성복 감독의 <해바라기 가족>(1959)에서 그는 신체불구자 창식을 연기했다. 항상 침대에 누워 있는 창식의 내면은 부글부글 끓어넘친다. 최무룡의 연기는 아버지 역할을 맡은 김승호와 대비를 이뤘다. 여유있고 능글능글한 김승호의 언사에 최무룡은 목발을 짚고 응접실을 좌우로 돌며 냉혈적인 불만을 쏟아 뱉는다. 통속 멜로에서 보여주던 여성 취향적인 연기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토해내는 분노의 표출 또한 관객의 허를 찔렀던 것이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에서는 김진규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김진규가 윌리엄 홀덴이나 록 허드슨의 유형이라면 최무룡은 몽고메리 클리프트나 제임스 딘의 유형에 가까웠다. 이 밖에도 <심야의 고백>(1962)에서 증오하던 노파를 살해한 뒤 법정에서 날선 대립을 펼치던 확신범의 연기와 고영남 감독의 <잃은 자와 찾은 자>(1964)에서 좌익과 우익의 인물로 분하며 이중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는 연기도 손에 꼽을 만한 대목이다.

신영균과 김진규가 보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엄격한 연기의 진실을 보여줬다면 최무룡은 그 보수성 뒤에 감춰진 위선적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최무룡을 좋아했지만, 또 그의 팬들 가운데 일부는 그를 등지기도 했다. 만약 최무룡이란 배우가 없었다면 50, 60년대 한국영화는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라고 훈계하는 모범답안적인 영화가 대부분이지 않았을까. 그가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60년대 중반부터 감독과 제작까지

최고의 연기력과 인기를 구가하던 최무룡에게도 시간은 변신을 요구했다. 그의 인기는 1960년대 중반까지, 아니 그 이상 꾸준했지만 그를 받쳐줄 작품이 별로 없었다. 김지미와의 스캔들도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계기였다. 물론 유두연과 노필, 박상호 감독 등은 최무룡을 꾸준히 찾았다. 그러나 신상옥과 유현목에게는 그가 더이상 필요없었다. 당시 두 감독은 자신들의 작품에 김진규와 신영균을 출연시켜 모든 상을 휩쓸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기적>이 최무룡이 등장한 유일한 문제작일 것이다.

이즈음 최무룡은 감독과 제작자로 변신했다. 배우 신성일의 등장으로 영화계의 판도가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연기에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첫 작품인 <피어린 구월산>(1965)을 비롯해 <나운규의 일생>(1966), <계모>(1967), <연화>(1967), <제삼지대>(1968) 등 자신이 주연과 감독을 겸한 작품을 꾸준히 내놓았다. 그중에는 성공작도 있었고, 좋은 연기를 보여준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최무룡은 자신이 제작, 감독, 주연을 맡고 일본 배우들을 등장시킨 한·일 합작영화 <고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민감한 한·일관계에 떠밀려 촬영을 거의 마치고도 개봉을 시키지 못했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김지미와 헤어진 뒤 긴 침체기에 빠졌다.

빚은 졌어도 최무룡은 돈을 잘 번 배우로 알려졌다. 워낙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에 밤무대에서도 그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의 노래로는 <눈이 나리네> <외나무다리> <단둘이 가보았으면> <외아들> 등이 있다.

돈은 잘 벌었지만, 돈이 남아 있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돈을 세는 법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을 그대로 꺼내주곤 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술과 밥을 사주고, 또 누군가에는 쌀을 팔아줬다. 그는 경제적인 마인드보다는 예술가적인 기질이 강했던 까닭에 애당초 돈을 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기력이 다한 그에게 다시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운이 있다면 과거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정치적 정략뿐이었다. 최무룡은 1988년 자신이 태어난 파주에서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사실 그는 정치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유두연 감독의 <어딘지 가고싶어>에서 보여줬던 정의로운 정치인의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권 동지, 한 많은 사람끼리 잘해봅시다”

그 이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나에게도 한동안은 타고난 멋과 분위기가 있던 추억의 스타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어느 날이었다. 친구와 한 커피숍에 들어갔는데, 구석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때의 모습이 꼭 그가 출연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박종호 감독의 영화 중 <서울에서 제일 쓸쓸한 사나이>란 작품이 있는데, 제목 때문이었는지 실제로 본 그도 쓸쓸한 분위기였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에 이끌려 다가가 인사했다. “영화 속의 선생님을 동경한 팬이자 배우입니다.” 나는 두서없이 과거에 본 그의 영화를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상념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권 동지, 우리 한 많은 사람끼리 잘해봅시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가난한 연극배우였지만, 그는 희대의 스타였으니까. 한이란 건 내가 많은 것이지, 그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1년 뒤인 1999년 11월13일, 영화배우 최무룡이 눈을 감았다. 내가 그를 만났을 당시, 아마도 그는 필름이 끊긴 영화관처럼 갑자기 어두워진 자신의 운명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아쉽고 그립다. 배우 최무룡이 보여준 사랑과 고독, 그리고 분노와 멋의 세계를 다시 보고 싶다. 이제 그가 간 지 10년이 지났다. 조촐한 추모의 글로 그리움을 달래는 바이다. 최무룡 선배님, 후배의 졸필을 용서하시고 편이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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