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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현] 나는 생산적인 인간이야

영화 <집행자>로 다시 돌아온 배우 조재현

무엇부터 써야 할지 망설였다. 현재의 조재현을 소개하기 위해 입에 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집행자>의 배우부터 연극열전 프로그래머, 연극열전3 오프닝작 <에쿠우스>의 연출가 겸 배우, 경기영상위원회 위원장, 얼마 전 막을 내린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까지. 돌이켜보면 배우 조재현 역시 언제나 예측을 넘어서는 구석이 있었다. 한때 김기덕의 페르소나로 불렸던 지독히 ‘나쁜 남자’가 <맹부삼천지교> <목포는 항구다> 같은 코미디나 제목부터 <로망스>인 멜로, 혹은 <피아노> <눈사람> <뉴하트> 같은 TV드라마나 자기 색 뚜렷한 연출가들,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등을 자유롭게 노닐었던 건 선입견과 한계를 경계하는 심성 덕이 컸다.

2004년 마흔의 나이에, 다른 작품도 아닌 <에쿠우스>에, 그것도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고 격정적인 연기를 펼쳐야 하는 열일곱 알런에 다시 도전했던 이 만만찮은 사나이는 철저히 현재진행형 인간이요, 필시 세상에서 가장 기록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갑작스런 한파로 뼛속까지 시렸던 11월3일 대학로. 잠의 흔적이 묻어나는 얼굴로 도착한 그는 그럼에도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방금 일어난 얼굴이다. =어젯밤 정태우, 류덕환과 <에쿠우스> 연습을 늦게까지 했다. 잘돼서 기분이 좋다.

-알런 역에 류덕환이 캐스팅된 건 비교적 늦게 알려졌는데. =<천하장사 마돈나> 때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알런의 이미지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살이 빠졌다는 거야. 만났는데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 장기 공연이야. 알런 역을 혼자 하기 힘들어.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집행자>는 “지금 현실에 맞는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어 선택했다고. 작품을 선택할 때 장르가 무엇이냐 혹은 상업영화냐 저예산 독립영화냐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 느낌이다. =장르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게 연기자만의 특권인데 굳이 한정하고 싶지 않았어. 사실 <마린보이>가 흥행 면에서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요번엔 나한테 맞는 작품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게 되더라고. 사형제도라는 이슈 때문에.

-어떤 면이 자신과 맞는다고 생각했나. =사실적인 소재잖나. 사실을 픽션화하긴 했지만. 그게 내 정서하고 좀 맞더라.

-<마린보이>의 강 사장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역할이다. 멋있는 중년 남자 같은 느낌. 다시 그런 걸 한번 해봐야지. 근데 좀 진해야 돼. 중년 남자가 나와가지고 폼만 잡고. 꽃 주고 지나가고. 아유, 그러면 안돼. 잔인함도 보여줘야 하고. 굉장히 젠틀한 것 같은데 치사함도 보여주고. 그냥 치사함이 아니라 연민으로 다가가는 치사함. 진하게 가줘야지. 깊게 가줘야지.

-중년 남성의 매력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다. =내가 하나 써야겠어. 시놉 하나 떠올랐다. (웃음)

-실제 교도소에서 실제 교도관들과 함께 찍었다고. =나는 교도관은 무서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솔직한 얘기로는. 근데 생각보다 더 편안한 사람들, 더 얼굴이 순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순하니까, 심성이 고우니까 그런 데 있지 않을까.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사형 집행신이다. 찍으면서 최진호 감독과 배우 모두 무척 괴로워했다고. =사형장 세트를 좀 음습하게 잘 지었다. 발판이 툭 떨어지고 하는 모습을 그대로 찍었는데 좀 기분이…. 아, 이거 내 발밑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구나, 참 잔인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최진호 감독은 오래전부터 알았다고 하던데. =최진호 감독이 쓴 시나리오들이 공교롭게 다 나한테 들어왔어. 근데 영화가 안됐어. 한겨울에 눈밭을 맨발로 돌아다니는 캐릭터가 있어. 얼마나 독하냐면 완전히 만신창이 돼서 발바닥 뼈가 튀어나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눈밭을 다니는 그런 인물인 거지. 최진호 감독이 독종 캐릭터를 잘 그려내. 그러다가 나도 잊어버렸지. 집에다 최진호 감독 사진 붙여놓은 것도 아니고. (웃음) 어느 날 조선묵 대표가 시나리오를 읽어보라고 그래. 시나리오가 괜찮아서 만났는데 최 감독 아니야. 답답한 사람일세, 왜 이야길 안 했냐고. 나랑은 2, 3년 주기로 계속 봤던 사람이지.

-이번 영화에서 센 느낌이 가장 잘 살아 있는 역할은 당신이 맡은 종호 아닌가. =시나리오는 더 셌어. 폭력을 가할 수 없는 게 교도관의 현실인데 가하는 자체부터 영화적 설정이 돼버렸지. 다른 인물들, 성환이나 김 교위, 오 교도 같은 인물은 사실적인 데 반해 종호만 영화적 인물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많이 표현은 안됐지만 시나리오엔 종호의 과거장면이 있다고. 그걸 통해서 이 사람도 평범한 인간이구나.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촬영에 임했어. 셀 땐 세지만 허하고 쓰리고 스산하고. 결정적으로 최 감독도 내가 윤계상에게 행패 부리는 놈을 때리라고 시키고 벽에 서 있는 장면을 찍고 나서 촬영 방향이 좀 바뀌었다는 거야. 종호도 마음이 아픈 사람이구나. 모니터를 보니까 그 느낌이 확 들더라는 거지. 선택을 잘한 것 같아. 왜? 일하고 생활하고 유사한 사람이 있다면 일과 사생활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지. 나는 종호를 그런 인물로 봤다고. 일을 할 때는, 특히 재소자를 대할 때는 냉철할 수밖에 없는.

-배우로서 당신은 어떤가. =음, 분리가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고. 근데 그 모든 면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어떤 역할에 있어서도. <천년학>에서 누이를 쫓아다니는 아련함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종호처럼 한번 불끈 했을 때 거침없이 못 참는 그런 게 또 내 안에 있고. <마린보이>에서 여자 앞에서 개폼 잡고(웃음), 그런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성환과 김 교위가 함께 나오는 장면에서 우는 관객이 많더라. =이 영화가 좋은 게 결과적으로 윤계상의 성장드라마도 아니고. 윤계상, 조재현 투톱 드라마도 아니고 세명의 집행자 이야기 같아. 시나리오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읽었을 때 가장 울컥하는 부분이 성환이 사형당하는 데였거든. 김 교위랑 성환이 결정적인 장면을 가지고 있다. 좋다. 한쪽으로 편중되지 않고. 내가 그랬다고. 주연 아니잖아. 주연처럼 감정을 끌고 가게 시나리오를 배치하면 어떡해. (웃음)

-예전엔 모든 게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나이가 들면서 바뀌더라. 영화 자체가 잘돼야지 배우가 돋보인다는 진리를 알게 된 거지.

-극단적인 감정을 조율하는 데 뛰어난 면이 있다. =잔머리지. 잔연기라고도 하지. (웃음) 모든 배우들이 그렇게 한다.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많은 리허설을 가지고 준비해서 가는 배우가 있다면, 나는 상황에 대한 인지를 얼마만큼 가슴으로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예를 들어서 유사한 신을 굳이 들자면 <나쁜 남자>에서 발로 차고 대사하는 장면 있잖아. 그것도 1분인가, 2분 찍었는데 전체 촬영은 10분 만에 끝났어.

-집중력이 상당하다. =저예산영화 찍을 때 필름 아끼는 버릇이 있어가지고. (웃음)

-<마린보이> 때도 그렇고 함께 출연한 후배들을 잘 다독이던데. =안 챙겨. 내가 그 애들을 왜 챙겨줘. (웃음) 나는 일단 나에 대한 선입견을 빨리 없애준다. 강하고, 같이 연기하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코미디언이 돼버리지. 일부러 나를 더 오픈해버리지. 근데 여배우한테는 그게 잘 안돼. 나름 아킬레스건이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굉장히 많지 않나. =내가 어떤 주의냐면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힘들어하질 않는다. 일이 많건 적건 간에. 하지만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억지로 못해. 연극도 그렇고 경기영상위원회도. 요번 (DMZ다큐멘터리)영화제도 대성공을 거뒀잖나. 적은 예산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DMZ 안에, 대성동 마을 안에 영화관을 지어줬잖나. 대성동에서 단 한번도 어떤 걸 해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 최초다.

-인력 구성이 훌륭하더라. =김동호 위원장님, 임권택 감독님, 다 내가 평소 존경하고 좋아했던 분들이다. 김동호 위원장님은 도쿄영화제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 전야제에 참석하시려고 했어. 근데 차가 없잖아. 의전차량이 있는 게 아니라고. 우리 아버지 차 보냈어.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이용관 교수, 이순재, 최불암, 손숙 선생님, 나를 믿고 참석해주신 분인데. 노력해야지. 연극열전도 그런 마음이지. 절실하면 하는 거야.

-지금까지 통틀어서 제일 바쁜 시기 아닌가. =남이 날 찾았다기보다 내가 사서 한 경우지. (웃음)

-경기영상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했을 때 우려하는 사람들은 없었나. =너 정치에 관심있냐. 그런 이야기 많이 하지. 난 전혀. 정치는 무슨 정치야. 영화제 때문에 뉴스에 나온 내 모습이 내가 봐도 좀 웃기더라고. 나는 그래서 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보람있고 상대방에게 보람있는 일을 좋아하는 거야. 연기자랑 비슷해. 관객한테 즐거움과 감동을 주고, 기뻐하는 그 모습을 피드백받으면 너무 행복하고. 그건 마약 같은 거거든. 더 좋은 건 연기자는 돈까지 쫓아와. 경기영상위원회나 연극열전에서 하는 일은 그것보다 더 깊은 만족감이 있다. 돈은 잘 안 쫓아오지. 그렇다면 그 일을 안 할 것이냐. 보람을 느낀다면 나는 하겠다 이거지.

-연극열전3 오프닝작이 <에쿠우스>다. 극 초반 다이사트 박사와 알런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데, 다이사트 역을 맡은 송승환이나 당신 모두 과거 알런을 연기한 전력이 있으니 정태우나 류덕환 입장에서 부담이 크겠다. =그 부분에 있어서 송승환 형이 굉장히 훌륭하다. 내가 연출까지 맡고 있는데 어떤 대학생들보다 연출의 디렉션을 잘 수행해. 내가 이러이러합니다, 그러면 “어 그래? 다시 해볼게”, 후배 배우가 알아서 만들어내길 기다리지 잔소리하지 않아. 나도 깊은 간섭은 안 해.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라. 굉장히 위험한 거거든. 내가 2004년에 했던 <에쿠우스> DVD를 얘네들이 보려고 하더라고. 보고 나서 약간 내가 했던 걸 해. 하지 마, 잘 못한 거야, 그런다고. 태우한테. 좋은 거 아냐. 자기 게 나와줘야지.

-당신의 다이사트는 언뜻 상상이 잘 안된다. =어저께 헤스터를 맡은 친구가 그러더라. 연극계에 알 만한 연출가나 배우들이 승환이가 다이사트 하는 건 그림이 그려지는데 조재현이가 다이사트를 해? 거참 궁금하네, 한번 가서 봐야겠네, 그랬다는 거야. 그림이 안 떠오르는 거지. 으하하하하. 그래서 나는 하고 싶었던 것 같아.

-“동성애적인 맥락을 읽을 수도 있다”고. =피터 셰퍼가 게이다. 작가의 의도가 가장 많이 드러난 게 다이사트의 감정이거든. 그랬을 때 다이사트의 상황을 쭉 따라가다 보면 와이프와 섹스도 하지 않고 헤스터라는 여자랑은 친구 같지만 관계가 없고. 알런을 통해서 뭔가 느꼈다고, 확신하게 됐다. 또 한 가지. 알런이 말을 탈 때 말과 똑같이 하기 위해서 재갈 대신 막대기를 입에 문다고. 그때 알런의 대사가 너무 빨리 일어나지 않게, 라고 번역됐어. 나도 옛날에 그렇게 대사를 했거든. 근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잖아. 우린 너무 빨리 흥분하지 않게, 로 대사를 바꿨어. 이건 사실은 말과의 섹스야. 그 모습을 보고 다이사트가 흠뻑 빠져버린 거야. 그러니 다이사트와 알런은 동성애적인 느낌으로 가는 게 맞다. 마지막에 다이사트가 알런을 부둥켜안는 게 단순히 부성애가 아니라 뭔가 좀 진하게. 알런이 땀에 젖은 말을 핥고 있듯이, 그 알런을 다이사트가 마치 핥는 것처럼.

-다음 계획은 없나. =내년 3월 <에쿠우스> 끝나고 4, 5월 지방공연 다닐 때쯤 송승환 형보고 지방공연 두 군데 가시라 그러고 한달간 어딘가 떠나 있겠다는 계획밖에 없어.

-좀 쉬고 싶은가. =그것밖에 없어. 그 다음 계획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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