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파주>의 여주인공 은모를 연기한 서우가 그랬다. <미쓰 홍당무>에서도 그렇고 드라마 <탐나는도다>와 <파주>에서도 그렇다. 서우에게선 어리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의 본능 같은 것이 느껴진다. 주변 환경의 모든 기운을 세차게 빨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꼼짝 못하게 지배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진 그런 존재. 스크린 위에서 자신만의 인장을 새겨놓으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리는 배우의 존재감을 아주 오랜만에 느꼈다. <파주> 관련 일정을 50여개 앞두고 있던 서우를, 그래서 만나야만 했다.
-<탐나는도다> 촬영현장에서 코디네이터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 <파주> 시사회장에서도 심이영이나 이선균 등의 동료배우와 팔짱을 낀 모습이 보였고. 천성적으로 참 다정하고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 같았다. =<탐나는도다> 제작발표회장에서도 주환 오빠랑 찬빈 오빠 손을 잡은 사진이 찍혔다. 전 그런 행사가 처음이다보니 너무 떨려서, 게다가 킬힐을 신고 있으니까 무대 위에서 넘어지지만 말자는 부담이 컸다. 그래서 오빠들을 잡은 건데, 가만두지 않겠다는 안티팬도 생기고. (웃음) 집에서 막내로 커서 워낙 몹쓸애교가 넘친다. (웃음) 아버지가 36년생이시다. 부모님이 거의 할머니, 할아버지뻘로 보일 정도로 늦둥이로 태어났다. 천성적으로 ‘앵기는’ 스타일이고 동정심 유발을 잘하는 막내 근성이 강하다. (웃음) 사회생활할 때도 그런 성격이 많이 반영되는 것 같다.
-<파주> 첫 장면에서 부옇게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70년대 배우 정윤희씨를 떠올렸다. 눈·코·입이 워낙 뚜렷하다 보니 서구적인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탐나는도다>에 이어 <파주>를 보니 오히려 고전적인 느낌이 강하더라. 본인의 얼굴을 자평한다면. =정형화된 얼굴은 아닌 거 같다. 얼굴도 좀 비뚤어져서 오른쪽과 왼쪽 인상이 많이 다르다. 촬영감독님들도 오른쪽에서 카메라 들어갈 때랑 왼쪽에서 들어갈 때 느낌이 다르다고 하시더라. 요즘 배우분들이 다 키도 크고 너무 예쁜데, 거기 비하면 나는 조금 특이하게 생겼고 어떻게 보면 새침데기나 막내 동생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여러 가지 면이 많이 보인다는 게 장점인 듯하다. 단점이라면 표현이 좀 세 보인다. 조금만 감정이 들어가도 너무 세 보이는 안면근육을 갖고 있다. (웃음) 특히 <파주> 찍을 땐 ‘<파주>스럽지 않다’는 지적도 자주 받았다. 놀라면 너무 놀라 보이니까, 그 표현들이 더 리얼해 보이려면 오히려 많이 누르고 조심해야 했다.
-작은 키와 동안이라는 조건이 오히려 한국영화에선 여배우의 폭을 넓히는 조건 같다. 선택할 수 있는 좁은 틀 안에서 많은 부분을 커버할 수 있지 않나. =정반대다. 데뷔할 때도 오디션만 보면 계속 떨어졌다. 선택의 폭이 참 좁았다. 너무 어려 보이는 것 때문에 성인 역을 못한다는 게 다수의 의견이었다. 그렇다고 연기를 안 할 순 없으니 차라리 어린 역으로 가보자, 뭐라도 하면서 배우자는 마음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문제는 또 그동안 맡았던 어린 캐릭터들 때문에 ‘어린애’ 이미지가 각인되어버렸다는 거다. 여러분, 잘 보면, 메이크업 지우면 동안 아닙니다. (웃음)
-<파주>에서 처음으로 본인 나이대 연기를 한다. =처음 하는 성인 연기라서 행복했지만 동시에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은모도 중요하지만 23살의 은모가 제일 어려웠다. 그때의 은모를 가장 가여워했던 것 같고 애정을 많이 가졌다. 그때의 은모에게서 보이는, 아직 어른 같지 않은 미성숙하고 미완성적인 모습이 나와 닮기도 했고.
-무용과 피겨스케이팅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고 들었다. 몸을 움직일 줄 안다는 건 배우에게 매우 큰 자산일 것이다. =엄마도 그러시더라. 네가 이렇게 연기를 할 줄 알았으면 어렸을 때 피겨는 왜 시키고 바이올린은 왜 시키고 무용은 왜 시켰을까 하고. 전 절대 아니라고, 그게 지금 나한테 너무 많은 도움이 된다고 대답했다. 어려운 살림에 나한테 이것저것 공부시킨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웃음) <탐나는도다>에서도 한복을 입은 채 뭔가를 찾아 헤매는 장면을 찍을 때 한국무용을 배운 티가 나도 모르게 조금 튀어나오는 걸 느꼈다. 표정 자체보다 앵글 전체를 먼저 보면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그 안에서 몸을 어떻게 움직일지, 미술이나 음악과의 어울림이 어떤지를 생각하는 쪽이다. 그런데 달리는 장면만은 예외다. <파주>에서 중학생 은모가 뛰는 모습이, 지금 내가 뛰는 모습 그대로다. 결국 성인 은모가 달리는 장면을 죄다 뺄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지적으로 뛰는 연습 중이다. (웃음)
-은모는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인물이다. 처음 접했던 은모는 어떤 인물이었고, 촬영하면서 어떻게 바뀌었나. =처음에는 은모가 평준한 산이 아니라, 암벽등반해서 넘어야 할 산 같았다. <파주> 시나리오도 설명적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사이사이에 어떤 공간을 만들어둔 감독님이 친절해 보이기 시작했다. 배우의 감정 혹은 관객의 감정과 상상력을 개입시킬 수 있는 공간이 군데군데 있다. 감독님은 디테일하진 않지만 가장 중요한 디렉션을 주셨다. ‘네가 느끼면 돼. 이 대본대로 안 해도 돼. 네가 정말 최은모라고 생각했을 때 그대로 하면 그게 진짜야.’ 그렇게 엄마처럼, ‘어려운 거 알아, 괜찮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시며 자유롭게 풀어주셨다. 서우라는 사람 위에 최은모라는 인물을 덧씌우는 게 아니라, 은모 위에 여러 새로운 상상을 덧붙이며 서우를 계속 버려나가는 과정을 감독님과 함께했다. 그렇게 천천히 은모가 되어갔다.
-그렇다면 서우라는 배우를 통해 은모의 어떤 점이 바뀐 것 같은가. =항상 배우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연출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인물의 90%를 만든다고 보는 게 맞다. 대신 나머지 10%가 배우의 몫일 것이다. 은모는 뭔가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걸 보여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서우다운 표현력이 어쩔 수 없이 들어간다. 나는 평상시에도, 말없이 눈으로 레이저를 쏠 수가 있다. (웃음) 나 짜증나, 나 배고파 하는 감정을 매니저 오빠에게 눈으로 쏘는 거다. 은모가 미성숙한 인물이니까 뭔가 감추려고 해도 그 눈빛에서 약간의 흔들림이 보여야 하는데,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 점은 대사 톤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모호하고 미묘한 말투들이 있다. 예를 들어 중식이 “3년 전에 왜 그랬니?”라고 물을 때 은모는 “두려워서요”라고 답한다. =매 컷, 매 순간마다 대사 톤에 여러 가지를 담으려 했다. “두려워서요”라는 대사도 그렇다. ‘너없이 살 수 없다는 게 두려워서 그걸 극복하려고 한 거야’, 혹은 반어법으로 ‘널 사랑해서 두려웠어’라는 뜻일 수 있다. 그렇게 뜻이 너무 많아진다. 매 대사, 매 감정이 정말 디테일하고 다차원적이면서 비정형적인 톤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했다. 은모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본심을 제일 밑으로 누르면서 마치 눈덩이를 굴리듯 감정 위에 이것저것 덧씌운다. 그래서 결국 그 안에 있는 핵은 보이지 않게 된다.
-은모는 인도에서 3년 동안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안 그래도 그 생각을 많이 했다. 아마 19살짜리 소녀가 낯선 땅에서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하느라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23살이 되어 자기 딴에는 ‘나는 괜찮아졌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파주로 향했을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상처투성이인지 모르고, 자기 감정에 희망을 품은 돌아온 탕자처럼.
-은모는 대체 중식을 언제부터 사랑한 걸까. 그 부분을 대략 계산해야만 감정선을 잡아나가기 편했을 것 같다. =아니다. 계산을 하면 너무 딱딱 끊어질 것 같았다. 안개가 툭툭 끊기면서 차오르는 거 아니지 않나. 자욱하게, 언제 안개가 이렇게 많이 꼈지? 싶은 그런 안개스러움을 갖고 싶었다. 나 역시 연기하면서 의문이 많았지만, 그 감정이 영화 전체에 자욱하게 깔렸으면 싶었다. 그래서 매 신을 찍기 전 그 직전 신이 뭐였는지, 그때 감정이 어느 정도 올라왔었는지 체크하고 들어갔다. 그게 나한텐 너무 중요하니까. 은모가 언제부터 중식을 좋아했는지는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촬영 중·후반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밥도 안 넘어갈 정도로 나 역시 공허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완전히, <파주> 찍으면서 늙었다. (웃음)
-파주라는 공간에서 올 로케이션을 한 것이 배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렇게 안개를 느끼고 만져보고 맡아본 적이 없다. 특히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엔딩신에선, 그 안개는 진짜 안개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없었다면 그 감정을 끌어내기 힘들었을 것 같다. 소방서 장면도 그렇다. 처음 촬영할 땐 소방차들이 사이렌을 울리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다가 진짜로 불이 나서, 소방차가 출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으로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듣는데,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더라. 그 소리를 듣는 표정 컷이 오케이났다. 사이렌 소리를 정말 들었던 게, 그런 도움이야말로 배우들한테 엄청나게 크고 중요하다.
-<미쓰 홍당무>를 통해 비로소 연기라는 목표가 생겼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엔 배우에 대한 열망이 없었던 건가. =전혀, 전혀. 하다못해 학교 장기자랑 때도 앞에 나가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내가 그런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애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렇게 태어난 애들은 따로 있다고 믿었다. 어릴 때 사진 중에 싱크대 앞에 쓰레기통을 놓고 그 위에서 설거지하는 사진이 있다. 초등학생 때까지 그렇게 살림하는 걸 좋아하는 조용한 애였다. (웃음) 중·고등학생 때부터는 <탐나는도다> 버진이처럼 망아지가 되었지만. (웃음) 학교 친구들 중에도 내가 나중에 배우를 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다. 아직도 실감은 안 난다. 솔직히 아직도 나보고 연예인이라고 하면 조금 불편한 감정도 든다. 그래도 이제 더 익숙해지고 더 배우스러워져야 한다고 다짐 중이다.
-2년 동안 센 작품을 3편 연달아 했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세 자매 중 막내인데, 엄마가 막내인 나까지 낳았을 때의 그런 기분? (웃음) 아직 세개밖에 못했는데, 많은 분들이 칭찬해주시고 예뻐해주시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또 쉬지 않고 달려와준 나의 체력과 나의 근성과 나의 열정에 되게 고맙다. 그동안 포기하지 않고, <파주> 찍을 때도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있었지만 끝까지 해냈다는 점이 후회없다. 물론 작품을 다시 보면 절대적으로 많이 미흡했다는 걸 느끼지만, 거기에 위축되지 말고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하자라고 생각한다. 원래 잘 위축된다. 귀가 팔랑귀라고 해야 하나. (웃음) 남들이 뭐라고 한마디하면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면서도 속은 이미 쪼그라든다.
-배우들에게는 자신감 빼면 시체잖나. (웃음) =자신감있는 척하는 것도 힘들다. (웃음)
-차기작은 어떻게 되나. =<파주> 일정을 잘 마친 다음 몸을 좀 회복해야 할 것 같다. 한약을 좀 지어먹으면(웃음), 천천히 결정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