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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개인으로,어쩌면 변절?
2001-02-23

네오리얼리즘에서 관념적 영화세계로 전향하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이탈리아영화 <자전거 도둑>을 피난처 부산 변두리의 중앙극장에서 관람한 나는 감동한 나머지 충격을 받은 채 극장을 나섰다. 당시의 극장 앞에는 사람 키 깊이의 도랑이 있었는데 나는 몽유병자처럼 흐느적거리며 걷다가 그 더러운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일어서려 하지 않는 나를 여러 사람들이 팔을 뻗쳐 겨우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때는 조감독 시절이었는데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에 심취하면서 장차 감독이 되면 이처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아 성취하려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잃어버린 청춘>(1957), <오발탄>(1961), <잉여인간>(1964) 등이었는데 주로 사회적 부조리를 리얼리즘 터치로 묘사하여 당시 긍정적 반응을 받았다. 다만 50년대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서 보여준 몽타주의 거부를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뉴스나 다큐멘터리 수법에 가까운 촬영수법도 바꾸어 영상적인 상징과 암유를 중요시했던 차이는 있지만 그 네오리얼리즘의 정신과 주제의식은 계승했다고 자부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급격한 경제적 부흥과 함께 그 네오리얼리즘의 경향이 10년을 넘지 못하고 50년대 중반에 거의 자취를 감춘 것처럼, 그리고 네오리얼리즘의 영화작가들이 대부분 방향을 바꾸어 인간을 중심으로 한 휴머니즘과 같은 경향으로 옮긴 것처럼, 나 또한 나이를 많이 먹은 탓인지 <순교자>(1964), <>(1967), <사람의 아들>(1980)과 같은 관념적 세계로 전향한 셈이다.

즉 나의 영화연출 역정에서 전반기는 사회성으로, 후반기는 정신세계로 양분할 수가 있다. 일부 평자들은 유 감독이 작가주의를 포기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즉, 애당초 사회 부조리를 추구했다면 끝까지 파고들어가야지 변절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애를 살아가면서 세계관이나 인생관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 소년 시절에는 몹시 병약한 몰골이었다. 자폐증과 고독을 안은 채 산과 들로 헤매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한 바가 있었다. 잡초와 들꽃에서 신의 섭리와 존재를 확신했고 또한 샤머니즘에도 관심을 쏟는 편이었다.

그러한 관심을 갖고 만든 것이 <>(1967), <옛날옛적에 훠이 훠어이>(1978), <장마>(1979) 같은 무속적인 것들이 있었다.

<>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한’의 역사였다고 할 만큼 쌓여온 ‘한’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 가지 에피소드에 묶은 옴니버스 형식이었다. 이 방식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일종의 ‘괴담영화’이지만 귀신 같은 것은 나오지 않고 서정적이고 토속적인 흐름에 몽환적인 내용을 실었다. 그래서 나는 종래의 연출기법, 즉 카메라의 심한 움직임이나 몽타주의 빈번한 사용 등을 일체 삼가하는 연출기법을 시도했다. 대신 동양적인 서정성과 신비의 세계를 살리기 위해 동양화의 특성이라 할 ‘여백의 구도’와 안개(스모크)의 효과를 노렸고 되도록 근접촬영을 피하면서 원경의 롱테이크로 ‘옛날옛적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샤머니즘의 이야기를 신비적으로 영상처리하는 것이 당시 관객에게는 이색적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처음 시도된 세 가지 이야기의 옴니버스영화라는 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데다가 당시 주간지에서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학술적 접근의 글이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는 바람에 이 영화는 명보극장 앞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호황을 누렸다. 단일극장에서 17만명이라는 흥행성과를 올렸는데, 그때 서울인구가 400만명이었으니 당시로서는 대박이었다.

한편 홍콩에서 서울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독일대사관의 문정관이 이 작품을 보고 하는 말이 홍콩의 괴담영화 즉 귀신영화들을 많이 보았는데 천박한 오락영화들이었지만 이 <>은 동양적 유현(幽玄)의 미학을 잘 나타냈다고 하면서 즉석에서 독일 정부 초청을 수락해 달라고 했다.

연합군에 패망한 독일영화계는 참으로 저조했다. 연합군쪽이 거대한 UFA의 체제인 삼위일체 즉, 제작, 배급, 극장의 합리적 운용을 분열시켜 독일영화발전을 마비시킨 결과라고 했다. 독일의 썰렁한 여러 스튜디오를 둘러보면서 강인했던 독일정신을 꺾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영화를 확산시켜 독일을 교화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유현목|영화감독·1925년생·<오발탄> <막차로 온 손님들> 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