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연구실에서 차우차우종의 개를 길렀다. 이 개는 프로이트의 반려 역할 외에 진료도 도왔다고 한다. 내담자에 대한 개의 본능적 반응을 보고 프로이트는 환자가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지 가늠하곤 했다. 프로이트의 손자인 초상화의 거장 뤼시앙 프로이트(1922~)는 할아버지에게서 적어도 두 가지를 상속받았다. 하나는 인간을 투시하는 재능이다. 조부가 선택한 도구가 정신분석이었다면 뤼시앙은 전통적 구상 기법의 회화를 통해 인간의 육체를, 나아가 정체를 포착한다. 프로이트가의 두 번째 집안 내력은 동물 친화력이다. 사람을 차치하면 개와 말은 프로이트가 가장 큰 열정을 기울인 모델이다. ‘프로이트의 개’라는 주제로도 전시회 하나는 거뜬하다.
프로이트는 인간과 동물을 동등하게 대하고 동일한 태도로 다룬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모델이 보유한 개성이다. 성격이 결핍된 대상은 그의 붓을 움직이지 못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는 사람, 아는 동물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게 초상화 작업은 외관의 모사가 아니라 대상의 신체와 정신을 연구하는 과정이다. 한편 묘사에 관해 프로이트는 무자비한 냉담함을 견지한다. 그가 그린 누드의 남녀는 이상하리만큼 관능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늙어가는 애견을 그린 작품에서도 감상성은 찾기 어렵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에 그려진 이 그림의 제목은 <개를 데리고 자는 사람>이 아니라 <둘의 초상>이다. 푸른 옷을 입은 성별이 불분명한 모델과 그 팔베개를 벤 위핏종(테리어와 그레이하운드의 교배종)의 개는 오수(午睡)에 빠져 있다. 팔뚝으로 빛을 가린 모델의 자세로 짐작건대 피로를 견디다 못한, 얕은 잠이다. 둘은 멀미에 지친 갑판의 승객처럼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삶의 항해가 그들을 곤하게 만들었나보다. 개가 기대고 있지만 위로받는 쪽은 주인인 것 같다.
프로이트의 단단한 필치는 인물과 개의 피부를 단단하고도 반투명하게 표현해, 그 아래를 달리는 핏줄과 힘줄, 뼈와 근육의 구조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매트리스가 감당하는 체중을, 나아가 일상의 무게를 보는 이가 실감하게 한다. 프로이트가 그린 개는 무작정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 아니다. 그의 몸에는 세월의 흔적과 고유한 ‘증세’가 새겨져 있다. 이는 섣부른 의인화와 다르다. 개는 놀라운 공감능력을 타고난 동물이다. 그들은 가끔 주인의 자세를 따라한다. <둘의 초상>에서 구도의 중심은 사람의 두팔과 거기 얽힌 개의 앞다리가 보여주는 호응, 그리고 가볍게 열린 둘의 입이 이루는 압운이다. 인간과 동물에게 공히 냉엄하고 섬세한 화가의 시선은, 이들을 어느 커플의 초상 못지않게 견고한 공존의 감각으로 감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