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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옥] ‘영화 같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주성철 사진 이혜정 2009-11-03

<파주>의 박찬옥 감독

박찬옥 감독은 무척 말을 아끼는 사람이다. 마치 그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그래서 가장 인터뷰하기 까다로운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다만 너무 오랜만의 영화라 그동안 만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일단 반가웠다. <파주>는 그 자신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고, 또한 그동안의 복잡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게 해준 영화이기도 하다. 어쨌건 더해진 세월의 무게만큼 영화 속으로 차곡차곡 쌓아둔 얘기들을 하나둘 들춰봤다.

-뿌연 안개와 알 듯 모를 듯 묘한 표정의 서우 얼굴의 느낌이 좋았다. 도입부는 어땠나. =<질투는 나의 힘>은 첫날 첫신 찍은 게 바로 그 타이틀 시퀀스였다. 잘 찍고 싶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음 영화 때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그래서 이번에는 크랭크인하고 나중에 찍었다. 타이틀 시퀀스는 영화의 첫 시작이라 제법 시간을 확보할 수도 있고 내러티브로부터도 자유롭다. 맨 처음 그려본 이미지는 사람이 아예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넓게 퍼져 있는 야외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생각보다는 잘 안 나왔다. <블루 벨벳>(1986) 같은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를 좋아하는데, 나는 언제쯤이면 잘 찍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웃음)

-안개는 야외 로케이션 때 100%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보면 되나. =커피 가루를 태워서 현장에서 연기를 많이 피웠다. 그래서 꽤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사실 나는 애초에 일부러 스모그를 만들어 피워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스탭들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댄 결과 그렇게 의욕적으로 만들어낸 거다. 난 저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이 정도는 필요하다’면서 막 피우는데 진짜 다들 천진스러운 게 너무 귀엽고 웃겼다. 시나리오의 지문을 보고 다들 그렇게 연구하고 받아들인 건데 가짜 안개처럼 느껴지는 것에 대한 예민함만 극복할 수 있으면 무방하다고 봤다. 다만 일정상 4월까지 찍게 되면서 겨울 안개가 자욱해야 할 시점에 개나리가 피고 해서 좀 힘들었다. (웃음)

-영화의 중심이자 전체적인 감정을 끌고 가는 배우가 바로 서우다. 언니 은수(심이영)나 중식의 첫사랑 자영(김보경)보다 어리고 미성숙한 여자다. 서우가 지닌 여러 요소들과 딱 들어맞는 캐스팅 같다. =개인적인 여담으로 이런 얘기하면 서우한테 혼날지도 모르는데(웃음), 그래도 너무 귀여웠던 기억이라서…. 서우가 고등학생으로 나올 때 공부하다가 쓱 쳐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 너무 열심히 공부하더라. 그냥 연기처럼 하면 되는데 정말 눈을 반짝이면서 공부하더라. 그래서 오히려 그게 가짜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미세한 차이이긴 하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얘기했다. 정말 열심히 연기했는데 그런 얘기를 들었으니 서우는 속이 좀 터졌을 거다. 그러다 우연히 몰래 서우가 메모한 걸 봤다. “저 여자 진짜 싫어.” 서우는 ‘저 여자’인 내가 그걸 본 줄 모를 텐데(웃음), 그게 딱 그 나이대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나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서 밉거나 한 게 아니라 정말 더 사랑스러웠다. 그런 느낌이 딱 그 시점의 은모 모습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의 감정이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재개발 주택의 철대위 장면이다. 은모와 중식의 감정이 고조되는 지점이기도 하고. =재개발 주택은 총 13일을 빌렸다. 어떤 시점에 딱 정해진 기간만큼만 빌릴 수 있는 거라 이왕이면 감정의 흐름에 따라서 시간순으로 촬영하는 게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서우와 이선균이 감정을 조절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특히 서우는 일정상 오전에는 중학생이었다가 오후에는 어른 연기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도 있었으니까 많이 힘들었을 거다. (웃음) 이선균은 나중에 다른 촬영하면서 ‘이제 그 느낌을 좀 알겠다’며 다시 그때 그 장면을 촬영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투쟁의 한가운데서 그런 사랑의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난방이 안되는 그런 황량하고 추운 가운데서도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거다.

-영화 속 철대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최근 벌어진 용산참사 등 직접적으로 현실을 환기시키는 지점이 있다. 그런 질문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런 재개발 지역으로 헌팅도 다녔고 철거투쟁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일하는 분들의 다큐멘터리도 봤다. 영화에서 용역깡패들이 인정사정없이 중장비를 동원해서 공격하는 모습이나, 철대위 사람들이 회의하는 풍경을 보면 그게 다 실제 벌어지는 일들이다. 시나리오 상태에서는 그런 설정들을 과거의 일쯤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그러면서 자신으로부터 그리 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짓고 부수는 개발의 풍경은 여전하지 않나.

-혹시 크랭크인에 앞서 이선균과 서우에게 참조하라고 얘기해준 영화들의 목록이 있나. =이선균에게는 특별히 어떤 영화를 보라고 한 건 없고 철거민이나 당시 학생운동을 그린 다큐멘터리들을 보라고 권했다. 서우의 경우도 딱히 어떤 영화의 어떤 느낌이라고 말한 건 없고, 영화에서 절친한 친구인 미애랑 계속 친하게 어울려 지내니까 <메이드 인 홍콩>(1997) 같은 영화에서 친구들이 어울리는 방식이 참조가 될 거란 얘기는 했다. 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친구들끼리 우정을 나누고 서로 살갑게 의지하는 그런 모습, 그렇게 현실을 이겨내는 힘 같은 것 말이다. 두 배우 모두에게 멜로영화를 추천한 건 없다.

-원래 미술 전공이었고 조예도 깊다. 파주라는 특정 공간, 안개라는 설정이 명확한 영화다보니 <질투는 나의 힘>보다 미술적 접근이 유효한 영화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전에 미술을 전공한 누군가의 영화를 보고 있자니 ‘저 사람은 영화가 아니라 매 장면 그림을 그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건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의식적으로 그런 태도를 멀리하고 싶었다. 그런 인위적인 바탕이나 꾸밈에서 시작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딱 ‘영화 같은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는 나의 힘> 때 사건도 없고 지루하다는 얘기를 좀 들었는데(웃음), 이번에는 정말 인물들이 필요한 말만 하고 공간감이 살아 있는 그런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는 영화를 그림 그리듯이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어서, 화면 그대로 어떤 정서가 되고 화면 그 자체로 얘기를 하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럼 혹시 영화 속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참고가 된 회화도 있나. = 떠올렸던 회화 이미지는 없고 촬영하면서 느꼈던 특정 그림은 있다. 재개발 아파트가 철거깡패들에게 침탈당하고 철대위가 회의하는 장면인데, 콘티에서는 앉아서 하는 걸로 짰는데 바닥 세팅이 좀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앉아서 회의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술감독 이하 미술팀이 좀 고생을 했다. 나중에는 ‘그냥 찍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세팅할 때 딴 데로 도망가 있었다. (웃음) 결국 모든 준비가 끝나고 촬영을 시작했는데 그 회의장면이 조명도 붉고 사람들 표정도 투박한 게 딱 고흐의 초기 그림인 <감자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파주>는 대담한 촬영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야외 로케이션이 주가 될 거라는 전제 아래 김우형 촬영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김우형 촬영감독은 유학을 갔다 오자마자 나랑 단편 <느린 여름>을 찍었다. 그전까지는 보통 단편 작업을 할 때 연출 전공 친구가 촬영을 대신 해주는 정도였는데, 나로서는 촬영을 전공한 사람과 함께한 첫 번째 작업이었다. 촬영이 다 끝나고는 “다음에는 콘티나 초기단계부터 같이 의논하고 함께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고 나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다음 작업이 바로 <파주>가 된 건데 다행히 김우형과 잘 맞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콘티나 앵글 잡는 것 등 많은 얘기를 나눴고 구체적인 디테일들에 대해서는 내심 김우형을 믿고 간 부분이 많다. 가끔 좀 과한 것들이 있었지만. (웃음) 그간의 경험에 따르자면 김우형은 평소 ‘내 주장대로 찍긴 해도 감독 마음에 들지 않는 숏과 앵글은 결국 버려진다’는 생각이 있었고, 난 나대로 ‘내가 요구를 해서 찍어도 촬영감독이 좀 아니라고 했던 것은 결국 늘 엉거주춤한 앵글이 나온다’는 생각을 따로 갖고 있었다. 그런 각자의 생각들이 <파주>에서는 조화를 잘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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