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하시는 분을 만나고 싶은데요.”
대담자로서 만나고 싶은 이를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불신지옥>의 이용주 감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그는 학부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뒤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심지어, 오랜 기간 동안 데뷔작으로 준비했던 이용주 감독의 불발 시나리오는 <건축학개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건축가 곽희수 소장과 이용주 감독의 만남은 이렇게 성사되었다.
건축가 곽희수는 ‘트랜스포머 건물’ 또는 ‘고소영 빌딩’이라 불리며 청담동을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축물 테티스(Tethys)와 배우 원빈이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강원도 정선의 루트하우스(42nd Route House)로 지난해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2관왕을 차지한 인물. 강남의 골목 풍경을 새롭게 사유하고, 대담하게도 국도변의 파사드(건물의 인상)를 바꾸어버린 곽 소장은 자신의 기반이 건축 이론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출발점은 미술이었으며, 건축의 신조는 건축주와의 철저한 공감이다. 정통의 길이 아닌 곳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자신들만의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것 또한 두 대담자의 공통점. 100% 토종이지만 어딘지 낯선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의 직업적 공감대에서 시작되었다.
이용주: 소장님께서 독립하신 때는 언제였나요?
곽희수: 31살부터 동업으로 시작했고, 33살에 완전히 독립했죠. 대학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서 좀 일하다가 큰 조직에 들어갔는데, 위에서 시키는 것이 너무 많았어요. 그게 너무 듣기 싫은 거야.
이용주: 저도 그랬어요. 양복 입어야 하고…. 사실 영화를 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이렇게는 못 살겠다.’였어요.
곽희수: (웃음) 동의해요. 사실 저는 회사 다닐 때도 제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어요. 회사에서 현상 설계를 해도 내 이름으로 나가지 않으니까, 공모전에 참여하려고 졸업하자마자 이대 앞에 사무실을 냈죠. 그렇게 두 군데를 다니면서 일했는데 어느 순간 양다리 걸치지 말고 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쉴 때는 쉬는 생활에 대한 욕망이 컸어요.
‘건축가는 관념적’이란 단정은 정당한가
곽희수: 건축가는 ‘대상이 없으면 반응할 수 없는 직업’인 것 같아요. 영화나 음악은 순수한 자신의 의지로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잖아요. 하지만 건축은 건축주가 프로그램을 주지 않으면 절대 혼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없어요.
이용주: 그렇게 보면 영화감독의 일은 건축과 학생의 작업과 비슷하죠. 학생 때는 자유롭게 필지를 정해서 설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잖아요. 영화감독들도 그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대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흥행 결과로 평가를 받으니까요. 건축은 재정이 확보된 뒤에 출발하지만 영화는 투자자나 기획하는 감독, 작가 모두 리스크를 안고 있죠. 저도 <불신지옥> 찍기 전에 5년 동안 썼던 멜로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제목이 <건축학개론>이라고…. 그게 엎어졌어요.
곽희수: 제목만 봐도 안될 것 같은데. (웃음)
이용주: 그렇게 엎어지면 5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거죠. 그런가 하면 순수예술의 측면과 엔지니어링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에 영화와 건축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영화로 전업하고 다시 건축가들을 바라보면서 느낀 점은, 필요 이상으로 그들이 관념적이라는 거였어요. 물론 관념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분들도 계시지만 이쪽은 기본적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직업이거든요.
곽희수: 저는 현상 건축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일상을 다루는 쪽이에요. 사실 ‘건축가는 관념적’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곤란해요. 굳이 일반화하자면 둘로 나눌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감각기관을 다루는 건축가가 있고, 감각을 다루는 건축가가 있죠. 예를 들어 눈이 나쁘다고 하면 메스를 눈에 대서 고치려는 사람이 있고 안경을 예쁘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겠죠. 저는 안경을 예쁘게 만들려는 사람이에요. 건물의 벽은 콘크리트로 지어지는데, 투명 콘크리트를 쓰겠다고 선언하면 그건 감각기관을 건드리는 거죠. 창문도 아닌데 투명하다니. 감각기관을 건드린 이들이 건축의 역사를 바꾸어왔고 또한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런 건축가는 아니에요. 감각을 건드리고, 얇고 가벼우면서 예쁜 안경테를 사람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학교에서는 감각기관을 건드리는 훈련을 많이 시키는데, 저는 이것도 조금 위험하다고 봐요. 왜냐하면 감각기관을 건드려서 성공할 수 있는 사례는 몇 되지 않거든요.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도시와 잘 어울리고, 이익을 제공해줄 수 있는 건물’을 원하니까요.
이용주: 관념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건드리느냐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건축을 할 때 늘 가졌던 생각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건축을 통해서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수단은 개구부, 도어, 계단 같은 것밖에 없으니까요. 메타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견고함이 건축에는 있다는 거죠.
곽희수: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관념으로는 건물을 만들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똑같은 계단이라고 해도 왕정 시대라면 왕이 꼭대기에 있고 그 아래에 아전들이 순서대로 서겠죠. 결혼사진을 찍는다면 주인공 부부가 중앙에 서고 친구들은 곁에, 그리고 부부와 덜 친한 하객이 위쪽에 선단 말이에요. 따져보면 이렇게 계단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장면들은 훨씬 더 많아질 수 있어요. 그래서 계단을 설계하는 이들은 그 치수와 재료 안에 그런 서사와 프로그램들을 연상하며 만들죠. 그렇게 계단의 디테일이 바뀌고, 높이가 바뀌고, 형태가 바뀌니까요. 그러니까 건축에는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담으면 되는 거고, 작가는 작가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죠.
이용주: 그게 제 성미에는 안 맞았던 것 같아요. (웃음) 예전에 ‘왜 나는 건축을 포기했나’라는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결론은 건축이 너무 점잖다는 거였어요. 마치 교장 선생님과 수학여행 가는 느낌?
곽희수: (웃음) 저도 똑같이 느꼈어요. 건축계의 어르신들을 만나면 “요즘은 오피스다운 오피스가 없어”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죠. 예전에는 저도 퉁명스럽게 “그럼 오피스다운 오피스는 뭔가요?”라고 되묻곤 했어요. 그분 말씀에 따르면 제 건물은 오피스가 아닌 거죠. 건물이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그런 시각 차이를 처음에는 갭으로만 보고 상대를 하지 않으려 했어요. 최근에는 연결고리를 찾았어요. 의례적인 말이 아니라 요즘은 정말 ‘저분들 안 계셨으면 내가 지금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고 자주 만나지는 않아요. (웃음)
이용주: 저도 영화 하나 망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저분들 없었으면 이런 영화 못 찍었겠구나라고.
곽희수: 제가 감독님께 궁금한 점은, 작가로서의 명성과 대중영화로서의 흥행 사이의 고민에 관한 거예요. 저도 지난해부터 주목받으면서 거기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감독님은 어떤가요?
이용주: 영화감독들에게는 절실한 문제죠. 저는 <불신지옥>으로 이름을 알리는 것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어요. 다음 작품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되는 부분도 그 지점이고, 저 외에 다른 감독들이 고민하는 부분 역시 그거죠. 이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감독은 한국에 10명도 되지 않아요.
곽희수: 건축가보다도 부담이 큰 편이군요. 건축가는 건축주 한 사람만 설득하면 되니까요. 그에 비해 영화는 염두에 두어야 할 대상이 많은 편이죠?
이용주: 그런 면도 있고, 영화는 개봉한 뒤에야 스코어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사전에 투자자와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작품성과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 예측만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죠. 건축 작업처럼 상대의 취향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가지고 설득해야 해요. 그럴 때마다 감독들은 교묘하게 술책도 많이 쓰죠. (웃음)
곽희수: 현장에서의 권한은 어떤가요? 건축가들에게는 무소불위의 힘이 있거든요. 한창 짓고 있는 중에라도 아니다 싶으면 현장에 가서 바꿔달라고 요구할 수 있죠. 설득을 하건 윽박지르건. 영화감독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을 것 같은데.
이용주: 감독마다 다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감독의 힘도 매우 큰 편이에요. 사실 건축도 현장에서 바꾸는 건 한계가 있잖아요? 땅 파기가 다 끝났는데 층수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영화현장은 그런 면에서 융통성이 있죠.
곽희수: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영화감독의 성향도 달라지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를테면 저는 컴퓨터 작업을 거의 하지 않고, 재료를 직접 주무르고 만드는 과정에서 답을 찾는 쪽이에요. 그렇게 자유롭게 시작해도 완성하고 나면 제 작품은 티가 나나 봐요. 영화에서 감독의 성향이 결정되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요?
이용주: 내재된 부분들인 것 같아요. 작가로 이름난 분들의 영화는 사전정보 없이 봐도 누구 작품인지 보이거든요. 대표적인 분이 홍상수 감독님과 김기덕 감독님이죠. 좀 섬세하게 본다면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에도 이름표가 붙어 있어요. 자신이 관심있어 하는 테마, 선호하는 질감, 만드는 방식, 그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강남의 풍경을 다룰 땐 패러독스에 주목
이용주: 그렇다면 반대로, 곽희수 오리지널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우선적으로 재료의 선택이 눈에 띕니다. 노출 콘크리트와 유리. 견고한 재료와 투명도가 높은 재료의 대비를 일관되게 가져가시는 것 같고요.
곽희수: 콘크리트를 쓰는 건 소재에 대한 제 나름의 정의예요. 저는 건물의 외피도 피부조직처럼 하나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거든요. 고소영씨 건물 테티스에도 별도의 천장재가 없어요. 외피가 바로 천장이 되고, 벽이 되고, 바닥이 되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른 재료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어요. 최근에는 돌을 좀 쓰기 시작했는데 돌은 판으로 만들거나 조각을 내서 외피에 덧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죠.
이용주: 일반 건물과 달리 주택에 대한 접근은 달리 갈 수밖에 없지 않나요.
곽희수: 그렇죠. 강남의 풍경을 다룰 때 저는 패러독스에 주목해요. 강북에서 옥상이라고 하면 가격이 싸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뒤집어보면 옥상층은 펜트하우스란 말이에요. 그리고 지금의 강남 한가운데에 주택이 들어서기는 힘들어요. 옥상은 가능하죠. 그러면 이제 옥상을 다르게 접근하면 되는 거죠. 8m 정도의 층고를 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집의 거실에서 열리게 되죠. 이렇게 도시에서는 패러독스로 접근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줘야 하죠. 원빈씨 주택 42번 루트하우스의 경우에는 주택에 언덕을 넣었고, 도로와 주택을 만나게 했죠.
이용주: 유연한 자세가 소장님의 강점이 아닌가 싶어요. 재료 등을 통해 조형적인 일관성은 지키되, 다른 아이디어는 주변 환경 즉 콘텍스트를 고려해서 해결하시려는 것 같은데요.
곽희수: 물리적인 콘텍스트는 고려하지 않아요. 콘텍스트에 따라 테티스를 지었다면 인근의 건물들과 비슷한 맥락으로 갔을 거예요. 대신 강남이라는 곳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이잖아요. 도로는 6m, 4m짜리 좁은 길이 얼기설기 펼쳐져 있고, 사적인 공간에서는 좌판 하나라도 더 내놓으려고 하고. 그래서 저는 여기에서 공공 부문과 사적인 영역이 만나는 방식을 바꾸려고 했죠. 1층의 인접면을 달리 가는 것만으로도 골목의 성격이 달라지는 거니까요.
이용주: 주변과 어울리는 것이 콘텍스트이기도 하지만, 강남이라는 곳은 건물들이 마음껏 뽐내려고 노력하는 공간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테티스는 콘텍스트와 충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42번 루트하우스의 경우에 노출 콘크리트라는 재료와 주변 풍광이라는 콘텍스트 사이에서 고민되지 않으셨을가 싶어요.
곽희수: 그렇죠. 주변이 다 논밭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액자처럼 논밭을 마킹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집 안에 전통적인 개념의 마당이 등장하고, 언덕도 등장해요. 이건 제가 넓은 땅을 다룰 때의 방식인데, ‘난지도 수변 생태 학습 센터’에도 건물 하나가 파빌리온처럼 서 있고 다른 하나는 넓은 땅을 액자처럼 가두어버려요. 어느 농경지 한 부분을 액자화하면 콘텍스트가 그 안에서 발생한다고 봐요. 그런 맥락없이 독립적인 건물만 세워버렸다면 주변과 끊임없이 충돌해야겠죠. 노출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42번 루트하우스에 적합한가의 문제는, 저는 일부러 재료의 다양성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그렇게 만들어놓으면 거기에 맞춰서 주변이 바뀌지 않을까라고 상상하기 때문이에요.
“영감을 불러일으키자”
이용주: 건축가들이 부러운 건 한번 작품을 만들어놓으면 그 자리에 오래도록 남는다는 거예요. 물론 나중에 다른 형태로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일단 상영이 끝나면 영화의 생명은 끝나는 거거든요.
곽희수: 글쎄요. 물론 건축을 완성하고 나면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일상적인 사건을 만들죠. 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아요. 사실 건축으로 소통하는 것은 나와 건축주 둘밖에 없잖아요. 제3자를 위한 건축도 있지만,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건축은 보이지 않아요. 대중이 집중해서 음미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에 반해 영화는 특정 장소에 가서 집중해서 봐야 하잖아요.
이용주: 그건 조금 다른 측면인데요.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학생 때는 답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 스스로 내린 답이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시간이 흐르고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 새롭게 획득되는 의미도 크죠. 그런 모습을 볼 때 부러워요.
곽희수: 지금 다음 작품 준비 중이신가요?
이용주: 당장 착수한 것은 없는데, 우선적인 욕심은 <건축학개론>이죠. 그런데 이 영화를 찍으려면 정말 집을 지어야 해요. 집 짓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라.
이용주(1970년생)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2009년 데뷔작 <불신지옥>·2009년 부산영평상 신인감독상 수상
곽희수(1967년생) 홍익대학교, 국민대학교 대학원 졸업·2003년 (주)이뎀도시건축 개소·2007년 KIA 신인건축가상 수상·2008년 ‘42번 루트하우스’로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 수상·‘테티스’로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