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계몽사 소년소녀문고 50권짜리를 수십번쯤 독파하고 나니 읽을 책이 없었다. 부모님이 젊은 시절 사다놓고(그 뒤로 한번도 들춰보지 않은 게 뻔한) 먼지 쌓인 세계명작문고본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세로쓰기 책이었다는 거…. 초등학생에게 세로쓰기 책이란 얼마나 가혹한가. 동심을 근사한 환상으로 뒤흔들었던 H. G. 웰스의 <녹색의 문>과, 내 또래 소녀가 인생의 비의를 처음 깨닫는 모호한 순간이 그나마 친숙했던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야한 부분만 대충 캡처해서 읽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얼마 전 13살 무렵 숱하게 되풀이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재구입했다. 밤샘 마감을 마치고 귀가한 새벽, 너무나도 뾰족하게 성난 상태였다. 그날 집으로 배달된 새 책들을 괜히 들춰보다가 <좁은 문>의 첫장을 펼쳤고, 단숨에 눈으로 달려내려갔다. 읽는 도중 몇번이나 소리내어 울었다. 어린 시절에는 인간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알리사의 숭고한 모습에 매혹되었다. 지금 다시 보니 알리사의 무수한 약점과 그녀의 잘못된 선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엔 별 관심도 가지 않던 알리사의 동생 쥘리에트에게 생생하게 감정이입된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 그 유명한 말, “자,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죠”를 읽을 무렵엔 알리사의 일기를 읽을 때보다 더한 상실감과 앞으로 이어질 나머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뒤덮이는 기분이었다.
무릇 고전이라 함은 ‘제목은 알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13살 때의 눈과 지금의 눈은 그만큼 달라졌다. 다시 펼쳐든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선 더할 나위 없이 모던한 ‘어장관리녀’가 등장한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연인이 채찍으로 그녀의 팔목을 후려치자 그 상처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는 소녀 지나이다는, 황량한 러시아 시골을 무색게 하는 열기를 뿜어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미야베 미유키를 뛰어넘는 흥미진진한 스릴러였고, 프랑수아 모리악의 <떼레즈 데께루> 시리즈에선 대도시의 감수성으로만 이해 가능한 팜므 파탈의 원형이 숨쉰다.
‘고전’이 달리 불로장생을 구가하는 게 아니었다. 이 작품들 면면에 녹아들어간 놀랄 만한 현재성과 보편성을 나이들어 하나씩 깨치는 건 남다른 맛이다. 그 순간 나는 100년도 훨씬 더 이전의 사람들과 맨 얼굴로 마주 앉아 말을 건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