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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현장감은 살리고, 유머는 늘리고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09-10-13

허진호 감독 인터뷰

허진호 감독이 하루에 다섯신을 찍었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전설이다. 그는 한 장면을 그렇게 빨리 찍는 감독이 아니다. 느리게 지켜보고, 거기서 생각을 가다듬고, 또다시 되뇌인 뒤 연인의 심리를 발전시킨다. 그러니 하루 다섯신이 아니라 어쩌면 다섯컷도 힘든 사람이 그다. 그런 그가 빨라졌다. 담아두기보다 버릴 것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현장, 그곳에서 그의 영화도 변화를 습득했다.

-3박4일의 짧은 일정 안에 과거의 사랑, 사랑의 새로운 발단, 갈등이 모두 담긴다. <비포 선셋>의 인상도 지울 수 없는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스스로 ‘어 이거 <비포 선셋>에서 본 거 아니야?’ ‘어 가만 있어봐.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웃음)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나는 일을 그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전 영화들이 계절이나 감정적인 변화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기간 자체를 주고 그 안에서 캐릭터들의 변화를 살펴보고 싶었다. 애초 짜인 시나리오는 없었다. 지진이 난 이후 한국의 중장비 업체 사람이 출장을 오고… 마침 내가 두보초당에 갔는데 영어 가이드가 있었다. 이런 식의 생각들을 한데 모아보면 어떨까 싶었다.

-청두라는 공간이 연인의 사랑을 쌓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자리한다. =그 덕분에 이번 작품은 공간부터 먼저 정했다. 청두가 주는 인상이 강했다. 처음 청두에 도착해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그 기사분을 영화에도 똑같은 역할로 캐스팅했다)이 실제로 운전을 영화에서처럼 거칠게 한다. 경적소리도 엄청나다. 처음엔 거슬렸는데 지내다보니 그게 이곳의 조화 같더라. 주 공간인 두보초당은 나도 처음 접한 곳이었고 그 느낌을 영화에 거의 모두 반영했다. 영화장면처럼, 가보니 실제로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고 있고, 아이들이 골목에서 바람개비 날리고 있고, 판다공원에도 가보니 재밌기에 영화장면으로 쓰고. 이런 식이었다.

-자칫 관광영화가 될 수 있는 풍경의 소재다. 게다가 이 영화는 청두쪽에서 단편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다가 지금의 장편으로 확장해서 제작한 영화다. =헌팅을 하는 동안 영화 속 동하처럼 짧은 기간 그곳을 여행한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 들어가서 찍는 감독도 동하 같은 낯선 경험을 하게 되고 그래서 가져오는 감정들이 반드시 생겨난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관광영화가 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중국 스탭이 대거 포함된 한·중 합작 프로젝트였다. 합작의 까다로운 절차에 앞서 촬영장 의사소통이 사실 더 걱정되었을 것 같다. =언어문제가 굉장히 힘들었다. 우리말로 할 때와 달리 서너배 시간이 더 걸렸다. 한마디를 전하려고 해도 통역이 필요한 상황이다. 물론 하다보니 기본적인 영화 언어를 중국어로 습득하게 되더라. 후반으로 가서는 수월했다.

-촬영장에서의 의사소통 제한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동하, 메이 모두 영어를 구사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영어는 모국어가 아닌 제3의 언어다.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이건 굉장한 장벽이 아닌가. =그게 참 어려운 부분이었다. 오랜만에 유학 때 만난 남녀가 만나 옛날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니 대사 자체의 분량도 적지 않았다. 대사를 피할 길이 없더라. 정우성도 영어 특훈을 받아야 했고, 고원원도 영어가 능숙하진 않아 그 부분에서 배우들이 굉장히 열심히 해줬다. 정우성이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냈는데 연습 때 자긴 한국어로, 고원원은 중국어로 먼저 감정을 끌어내보고 그 감정을 그대로 영어 대사를 할 때 옮기면 어떻겠냐고 했다. 언어가 달라도 사랑의 감정 자체는 별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동하는 30대 평범한 직장 남자의 전형이다. 지금껏 ‘배우’로만 존재하던 정우성에게 그런 옷을 입힌 건 의외의 선택이었다. =사석에서 봤을 때 그가 가진 일상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쉽지 않다는 건 나나 정우성이나 모두 서로 알고 있었다. 이 배우의 생활의 모습을 좀더 보여주자, 좀더 유머를 가져가보자 싶더라. 좀 삐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투박한 모습도 있고. 정우성이 가진 보여지지 않았던 모습들이 잘 나온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고원원의 캐스팅 역시 조화로웠다. 고원원의 신선한 표정과 연기가 일상 안으로 들어온 정우성을 보충하고 지지해주는 데 일조했다. =만났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데 고원원이 그렇다. 특히 배우를 만나면 배우와 그 인물 사이의 갭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고원원은 그런 갭이 없는, 그 사람이 그냥 그 배우인 사람이다. 연기에는 굉장히 욕심도 많고 열심이지만 촬영하지 않을 때는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과하게 내보이지 않는다. 이전의 출연작들을 봐왔지만 크게 영향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그 느낌들을 살렸다.

-영화 속 시간은 3박4일이지만 그걸 이들의 사랑 전부로 보아서는 안되는 괄호쳐진 전사(前事)가 있다. 어찌 보면 결국 전작과 마찬가지의 긴 연애사일 수도 있다. 사랑에서 타이밍의 역할이 그렇게 큰 건가. =타이밍 때문에 사랑이 결정된다고 하면 너무 사랑이 운명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른 시기에 만나서 잘되는 것도 결국은 운명일 수 있다. 과거에 감정이 있었지만 묻어두었던 것들, 다시 만나서 그걸 잡고 싶다, 둘 다 그런 느낌을 가진 게 좋았다.

-기억을 결국 연애의 소도구로 사용한 거다. =과거 그들의 관계에 정확한 설정은 가지고 가지 않았다. 기억들도 서로 정확지 않다. ‘널 좋아한다’고 말한 것을 잊어버리고, 그런 기억을 놓고 서로 공방전을 펼치고, 핑계를 대고. 이런 식이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했을 말을, 누군가는 취해서 들었을 수도 있는 거다. 현장에서 이런 설정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고 재밌게 작업했다.

-전작들에는 어느 한쪽이 찾아온 사랑에 한발 다가서지 못하는 원인, 이유, 죄책감이 항상 존재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스포일러 문제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 그런데 이번엔 도덕적인 면죄부가 의외로 쉽게 찾아온다. =메이는 어떤 이유로 자기 욕망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여자다. 그게 상대편인 동하를 더 안달나게 하고 적극적이게 만든다. 아마 그녀에게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게 지금 시기엔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가 아닌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아주 먼저 알았던 사람. 이런 관계라면 좀더 편하지 않을까.

-전작보다 두 연인의 밀고 당기기에 좀더 관대해진 건 아무래도 전작에 비해 부쩍 늘어난 코믹한 상황들에 있을 것 같다. 박진표 감독과의 대담(<씨네21> 622호) 때 코믹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피력하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이 정말 있다. 영화를 만들고 나서 관객의 반응을 볼 때 제일 좋았던 게 관객이 웃는 거였다. <봄날은 간다>에서도 상황상 많이 웃었는데, 이번에도 좀 웃겼으면 좋겠다 싶더라. 코믹한 부분을 전담한 김상호씨 같은 경우, 본인이 제안한 대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호텔방에서 <소문난 칠공주> 장면이 나오는 건 헌팅하러 갔을 때 중국인들이 실제로 그 드라마 이야기밖에 하지 않기에 그걸 활용해보자 싶었다. 정우성도 본인이 직접 코믹한 대사나 행동을 하진 않지만, 상황 때문에 우스워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

-허진호의 영화라는 점에선 이번 작품에 많은 변화가 엿보인다. 공항에서의 카메라의 활발한 움직임엔 조금 당황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결벽적일 만큼 고집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32일 만에 모든 촬영을 마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적으로 부족하다보니 그 제약이 오히려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전에 써보지 않았던 것들도 일단 해보게 되더라. 그 장면 같은 경우, 공항 카페에서 촬영이 끝났는데 마침 4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하루 더 있다 갈까’라고 동하가 이야기하는데 좀더 동적인 장면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때 누구 하나라도 ‘조금 힘들 것 같다’고 말했으면 그만뒀을 것 같다. 그런데 다들 지친 상황에서도 오케이하더라. 사전협의 없이 통제되지 않는 공항에서 찍느라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배우에게도 디렉션 주지 않고 상황만 가지고 감정을 표현하자고 했다. 급박하다보니 오히려 두 배우에게서 재밌는 표정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이질적인 화면이라니. 찍어두는 것까진 가능하지만 가혹한 편집이 기다렸을 텐데. =그래서 그 장면은 편집도 촬영감독에게 일임했다. (웃음) 하고보니 나도 그런 걸 해보고 싶었구나 싶더라.

-작정하고 변화하려 드는 게 아니라서 오히려 받아들이긴 편했다. 전작과는 규모 면에서도 부담이 적었던 게 아닌가. =사실 이번이 부담 더 컸던 것 같다. (웃음) 계속 뭔가 반복된다는 느낌이 있었고, 어떻게 변화를 가져갈까 하는 식의 고민들이 항상 있었다. 원래 허진호라면 그렇게 찍는 부분들, 그게 존재하니 항상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난 반드시 롱테이크를 고집해’ 하는 건 아니지만, 한번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이 그걸 버리는 건 쉽지 않다. 그 표현방식이 내겐 쉬운 것이다. 그런 형식들이 과연 필요한 걸까, 한번 깨보는 것도 좋겠다. 꺾을 필요도 있겠구나 싶더라. 김병서 촬영감독과 함께 많이 고민했다. 길게 찍던 걸 버리고 나눠 찍었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더라.

-이 변화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게 생겼다. =글쎄. 아직 다음 작품을 정하진 못했다. 아직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장르를 연출할 수도 있는 거고. 이번 작품에서 시도한 것들이 좋은 경험이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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