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기봉은 국제적으로 이미 이름을 알린 다른 홍콩감독들이 수시로 영화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자신이 뿌리를 내린 홍콩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대부분 홍콩을 중심으로 제작하여 (그 뒤 중국 관객을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소재의 토속성이 아주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살아 숨쉬는 홍콩의 느낌과 사회 분위기에 대한 감상을 그려내고 어떤 경우에는 정치에 관한 비유도 묻어난다. 그의 이러한 홍콩에 대한 자각은 그를 앞 세대의 상업영화 감독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실력의 감독으로 홍콩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두기봉의 영화는 다루는 소재와 촬영 스타일은 다양하지만 정작 본질이나 목적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독특한 영화사상에는 항시 무협영화사상이 뿌리 깊이 내리고 있었으며 캐릭터마다 협객의 기개를 지녔다. 그를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근 10년 내 비관적인 전망의 홍콩영화산업에서 영웅과 영웅의 기개를 표현해낼 수 있었던 많지 않은 감독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무협영화사상에 뿌리를 둬
가령 두기봉, 서극, 임영동 감독이 합작한 <트라이앵글>을 보면 세 감독은 똑같이 무협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더구나 서극은 신무협영화 <접변>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개척함과 동시에 <황비홍> <천녀유혼> <촉산> 등 전형적인 무협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발단, 전개, 결말로 구성된 세 부분 중 뜻밖에도 두기봉이 연출한 부분이 가장 무협적 경지에 도달했다고 평해진다. 여러 무리가 한데 섞인 강도 집단이 야외 상점에서 임달화 일당과 숨바꼭질을 할 때의 조명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면서 적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장면은 호금전의 <용문객잔>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호금전의 <용>이란 작품에서 적병이 객잔 안에서 쫓고 쫓기며 좌우로 날쌔게 피하는 장면은 한편으로는 경극 <삼차구>를 표방하기도 하다. 두기봉은 창작의 자유스런 범위 내에서 매번 부딪치는 중요한 내용 전달과 화면 처리에 이르기까지 무협영화의 신념이 영화에 그대로 녹아난다. 그러므로 영화의 사소한 부분에서조차 두기봉 감독의 색깔과 무협영화의 근원을 잘 나타낸 <트라이앵글>은 아주 좋은 예라고 할만 하다.
두기봉의 이력을 되짚어보면 그의 무협액션영화 처녀작 <벽수한산탈명금>은 서극 감독의 <접변>보다 1년이 늦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두기봉은 본인이 창작한 내용을 바탕으로 촬영장소를 일부러 중국 대륙으로 옮기는 등 영화의 대사나 독특함, 연기자들의 캐스팅 방식 모두가 서투른 단계에 머물렀다. 그 자신 역시 창작적인 면에서 스스로가 미성숙한 단계에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의 배경에는 두기봉이 70년대 초 우편물배달 직원으로 방송국에 입성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부로 승진해 왕천림 감독의 TV드라마에 동행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왕천림은 영화계에서 인정받아온 실력파 감독으로 김용의 작품 <서검은구록>을 위탁받아 찍기도 했으며 대만 전체의 연기자들을 총동원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TV 최초로 김용의 작품을 각색한 무협액션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는 중요한 장면은 종종 무협영화의 이념을 바탕에 두고 처리한다. 예를 들어, <더 히어로> 속 류청운과 여명이 식당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두기봉은 첫 만남이지만 서로 통하는 무언의 감정, 즉 고수가 서로를 알아보고 대결을 벌이기 전 서로의 무예를 견주어보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식탁 위에서 서로 동전을 던지는 장면을 두고 동전이 두 가지 각도로 보이는 은유의 방식을 채택했으며, 이후 두 사람이 긴 의자를 사이에 두고 건배로 마무리 짓는 장면에서 두 인물의 우정을 예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했다. 이런 장면은 장철식 무협영화에서도 유사한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고수가 무예를 겨루는 다른 한 예를 들자면 <참새>에서 두 무리의 소매치기가 빗속에서 결전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을 들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두기봉은 무기를 앞세워 결전을 벌이는 장면을 버리고 날카로운 편집과 치밀한 화면 구성을 통해서 전투 태세를 갖추는 기세, 클라이맥스와 진검승부를 기존의 방식을 교묘하게 변화시키는 수법으로 완성하였다. 이 장면은 무협영화 중 무리를 지어 싸우는 것을 모티브로 삼고, 현대적인 세팅과 의상을 배경으로 간간이 느린 화면이 보조되면서 격렬하고 짜임새있는 무협 고수의 힘겨루기 장면으로 완성되었다.
두기봉은 비록 무협물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결코 그것에 구애 받지 않는다. 마음 닿는 대로 표현하며, 스스로를 도구의 상징, 어떤 기호나 부호에 가두려하지 않는다. 당연히 과녁 없이 활을 쏘는 식의 의미없는 자아도취적 표현도 없으며, 연출을 위해서 연출을 하고, 무협을 위해서 무협을 만든다.
협객의 기개가 살아있는 캐릭터들
두기봉이 무협강호를 총애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으로는 차별화된 표현 방식 외에도 무협의 핵심 정신 즉 강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를 들 수 있다. 중국인은 영웅의 기개를 믿는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이것이 바로 두기봉의 영화 중 강조되는 ‘의협’이다.
가장 극단 적인 예로 중국 민간놀이 마작을 소재로 춘절 기간에 상영된 <역고력고신년재>(2002)가 있다. 유덕화가 맡은 마작의 명수는 현대적인 외양을 갖춘 고대 협객의 성격을 지닌 인물로 크게는 마작으로 서민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소시민과 가정주부를 마작 협잡꾼들에게서 보호하고 개인적인 이익과 운명적인 상승과 몰락, 그에 대한 타인의 오해 섞인 시선을 한편으로 제쳐둔 그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불의에 대응하는 것이다.
두기봉은 무의식 중에 종종 사소한 부분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한다. <참새>와 같이 소매치기가 등장하는 영화에서조차 의협심을 드러낸다. 임달화는 소매치기 업계의 선배에게 속박당하는 임희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안전을 뒤로한 채 위험을 무릅쓰고 소매치기 기술로 선배와 대결을 펼친다. 그 와중에 자신의 몫은 한푼도 챙기지 않는다. 오로지 타인의 자유를 위해 고군분투할 뿐이다. 이 부분은 두기봉의 협의 강호 정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농후한 도덕관념을 내포한다. 즉, 그것은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정의를 좇아 행동할 줄 아는가, 그리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출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강호가 추구해온 일종의 행동주의적 규율이며, 또한 자아실천의 표준이 된다.
변화무쌍하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두기봉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극적인 충돌은 바로 임무의 집행과 의협의 실천 간 모순이라는 점이다. <미션>은 이 모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만한 그만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 영화에서 떠돌이들로 구성된 살인청부업자조직 오인조는 조직 두목의 경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조직원 중 하나와 두목의 아내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를 목격한다. 두기봉이 설정한 이 떠돌이들은 인(仁)과 의(義)의 중간 지점에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든 임무를 이행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담보로 친구를 구할 것인가 사이에서 갈등에 빠진다. 임설이 두목 아내의 암살현장에서 황추생 등과 아지트 내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보고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이 장면은 다섯명의 관계가 매우 밀접함을 형상화했다. 결국 그들은 인과 의 사이에서 친구의 생명을 위한 위험한 외줄타기를 선택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명령에 복종하는 떠돌이에서 스스로 신념을 지니고 투쟁하는 협객으로 거듭나게 한다.
최신 작품 <복수> 역시 같은 유형의 작품이다. 주인공은 프랑스 배우 조니 할리데이지만 복수는 조니 할리데이의 개인적인 바람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임달화가 이끄는 암흑가의 두 부류가 존재했다. 그중 황추생, 임설, 임가동이 조니 할리데이를 도와준 이유는 임달화가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정의를 향한 자기 신념을 실현할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미션>에서 임달화의 수하인 오인조가 이익의 추구를 떠난 신념과 사명을 이유로 갈라섰듯이, 여기서도 같은 이유로 변화한 협객(황추생, 임설, 임가동)과 떠돌이(황일화, 장조휘, 우정화)의 대결이 이루어진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두기봉 영화는 무협영화의 영향을 받아 곧고 의협적인 사상이 깊게 자리한다. 그의 장점은 변화무쌍한 것,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두기봉의 자신만의 통일된 스타일은 TV 활동 시기의 연출 활동을 통해 여러 다른 소재와 환경에 적응하며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