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여행을 상상할 때 우리 머릿속에서 즉시 불려나오는 그림은 무엇일까. 눈앞의 좌석 등받이와 안전벨트 램프 그리고 승무원이 기내식 수레를 밀며 다가오는 긴 복도다. 그러나 스튜어디스가 지닌 비행의 이미지는 판이할 것이다. 한 공간을 체험한다고 그 공간의 모든‘면’(面)을 알 수는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시야를 차지하는 ‘프레임’들을 더듬어보자. 눈을 떠서 마주보는 벽지와 화장실 세면대 거울, 책상 앞에 세워진 파티션이 차례로 시야를 채운다. 매일 똑같은 그림책을 순서대로 넘겨보는 형국이다. 더구나 대동소이한 설계로 지어진 한국의 아파트 생활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여행이 선사하는 해방감의 큰 부분은, 여행지에서 눈을 떴을 때 다가서는 새로운 구도, 일상적으로 우리를 가뒀던 고정된 평면이 일시적으로 걷혔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최윤정의 <붉은 커튼>과 <우산>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우리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그림이다. 작가는 실내 풍경이나 정물이 아니라 시야 자체를 그린다. 구도의 중심은 없고 무엇부터 봐야 할지 지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특정한 무엇을 포획할 의지없이 아파트 실내에서 미끄러지는 우리의 시선을 재현한다. <노스탤지어> 연작은 ‘집’이라는 관념의 투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명 연작 중에는 아파트의 골조를 흰색 구조물로 환원해 벌판에 세워놓은 작품도 있다. 죽은 코끼리의 뼈로 지은 스톤헨지 유적을 닮은 그 그림은, 집이 삶을 분할하고 수납하는 무기질의 견고한 틀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노스탤지어> 시리즈는 또한, 18세기 후반 선비들의 방을 장식한 책가도 그림(책더미와 서재의 소품을 그린 정물화)을 연상시킨다. 화가의 시점이 일정치 않아 입체를 그렸는데도 평면적이라는 점, 곱고 화사한 색채를 구사하면서도 화려하지 않다는 점이 그렇다. 실존하는 물체를 비현실적 구도로 배치한 책가도처럼 <노스탤지어>는 현실의 대상을 그린 구상화면서도 초현실적이다. 그래서 으스스(uncanny)하다. <붉은 커튼>의 흰 천으로 덮인 용도가 애매한 테이블, <우산>의 오른쪽 끝만 드러난 거울은 비밀을 암시한다. 왼쪽 그림의 거실 창과 오른쪽 그림의 현관문은 외부를 향해 열려 있으나 그 너머 풍경에는 소실점이 없어 실내 전체에 평면성을 거꾸로 불어넣는다. 아니, 산호색 커튼 너머 푸른 바다와 현관 밖의 숲은 집 밖의 실제 풍경이 아니다. 차라리 이 세계가 이따금 균열을 일으킬 때 그 틈새로 드러나는 진실에 가깝다. 이 그림들을 바라보는 경험은 내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는 것과 비슷하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문득 아무도 오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