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의 CinDi토크 발제자로 한국을 찾은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전 편집장 장 미셸 프로동의 발제문을 보니 이런 문장이 있다. “사실, 평균적인 서구 시네필들(평균적인 서구 영화팬이 아니라!)은 일본의 거장 몇명과 샤티야지트 레이를 제외하곤 아시아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아시아영화의 실체는 실상 서구인들의 눈의 재량을 이미 넘어 광대했다는 맥락에서 쓰인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다가 그 주요한 맥락이 아니라 그가 “서구 시네필들(cinephile)”이라고 말한 다음 괄호치고 “서구 영화팬(filmgoer)이 아니라”라고 한 사소한 강조에 잠깐 눈길이 멈추었다. ‘시네필’과 ‘영화팬’은 다르다는 뜻일 거다. 무엇이 다를까.
언젠가 프랑스에서 영화를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에게서 시네필의 특징은 영화를 본 뒤 토론과 학습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생산하는 데 있다고 들은 적은 있다. 한때 우리에게는 영화광이라는 말이 흔했다. 이것이 영화팬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은연중 시네필에 대한 나름의 절박한 번역어 내지는 대체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런저런 용어의 뜻을 풀이하고 좇을 마음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에둘러 말해보면 어떨까. 시네필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영화팬은 영화 보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렇다면 그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위의 필자는 아시아영화를 접하면서 찾아온 변화를 고백한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바로 세계를 보는 우리의 방식이 변했다. 또한 우리는 처음으로 세계에 대한 오랜 서구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세계와의 관계를 보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때 그 세계의 관계를 보는 방식의 변화란 영화팬의 변화가 아니라 시네필의 변화일 것이다. 영화팬에게는 호불호가 최종 단계이지만(이 영화는 너무 싫어! 너무 좋아!) 시네필에게는 변화가 시작이기 때문이다(이 영화가 왜 좋은 거지? 왜 싫은 거지?).
세계를 이해하여 무엇을 할 텐가? 그렇다. 시네필의 길은 대망의 프로젝트는 안될 것이고 사소한 사색의 길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대개 예술을 사랑하는 자들의 행위가 다 그렇다. 한국에서 영화팬은 줄지 않았는데 시네필은 줄었다는 느낌이 들며 찾아온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