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20년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지금쯤 한창 늘어져 있어야 할 뱃살은, 인자해 보일 이마의 주름살은, 껍데기처럼 까슬까슬해졌을 손등은 8억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금액 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영화배우 데미 무어 이야기다. 미모 유지를 위해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한 그녀의 피부는, 그녀와 아주 많이 닮았다고 알려진 전남편 브루스 윌리스의 연인(그녀는 서른살이다)의 피부와 다르지 않다. 데미 무어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누구든 시간과 충분한 돈이 있다면 흘러가는 시간을 늦추거나 멈출 수 있다. 젊음은 더이상 젊은이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젊음은 현대시대 권력과 능력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한 사람의 젊고 늙음은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내면의 나이를 세는 것이 아니라면 대개 사람들은 피부의 상태를 보고 그 사람의 연륜을 짐작한다. 탄력이 있다면 젊은 사람이고, 축 늘어져 있다면 늙은 사람이다. 그런 연유로 최근에는 피부를 무던히도 괴롭히는 게 일종의 트렌드가 되었다. 탄력있는 몸매를 위해 피부를 때리고, 자르고, 꼬맨다. 동안 얼굴을 위해 화장품으로 얼굴을 잔뜩 덮어 피부의 호흡을 차단한다. 그 어느 때보다 피부의 가치가 높아졌지만, 정작 피부 자신은 혹사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미술가들의 피부에 대한 사유가 담긴 전시회 <Ultra Skin>을 관람했다. 유독 시간의 흐름과 아름다움의 의미를 사유하는 몇몇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사람과 인형이 구별되지 않는 줄리안느 로즈의 <Livedolls#2>나 아가씨의 얼굴과 노파의 손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안네 올로포슨의 <Naked light of Day> 같은 작품들. 재미있는 건 피부색 차별에 관한 센세이셔널한 작품도 몇점 있었는데, 그것들은 더이상 주목을 끌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느새 유색인종 차별은 ‘피부의 권력화’라는 문제에 한 걸음 밀려난 듯하다. 문제는 유색인종 차별과 달리 피부의 권력화는 전세계 자본주의 국가의 공통된 문제라는 점. 피부의 수난시대는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