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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져] 나의 고성방가를 허락하라
2009-09-04

이경석의 ‘에어기타’

<소년 메리켄사쿠>

요새 누굴 만나면 휴가 갔다 왔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럼 나는 술 먹는 게 휴가라고 한다. 마감에 쫓기다 보니 놀러 갈 시간 있으면 술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다. 또 다른 이유는 며칠씩 혼자서 작업을 하다 보면 말을 몇 마디 못한다. 갑자기 전화를 받게 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 이유로 한번씩 나가서 술 먹고 떠들어야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겠는가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술을 마시는 진짜 이유가 있다. 1, 2차가 끝나고 3차를 갈 차례가 되면 나는 무조건 우리 작업실로, 친구들 일명 ‘홍대 3인조’를 끌고 온다. 그러고는 날이 밝을 때까지 음악 틀고(우리는 오로지 쌍팔연도 헤비메탈 사운드, 오지 오스본, 아이언 메이든, 주다스 프리스트 등을 고집한다. 참고로 나의 만화가 데뷔작은 <록커의 향기>였다) 에어기타를 치고 헤드뱅잉을 한다. 그 순간만큼은 로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싶어서다. 여기서 ‘에어기타’라 함은 기타도 못 치는 인간들이 기타 치는 시늉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만든 용어다.

그런데 밤새 에어기타를 치는 게 쉽지가 않았다. ‘고성방가’라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해야만 했던 것이다. 원룸 옥탑에 살 때는 심지어 이걸 하려고 3웨이 중형 스피커까지 중고로 들여놨는데…. 몇번 해보지도 못하고 이사 올 때 버렸다. 모래내 작업실에서는 경찰이 도박장인 줄 알고 쳐들어온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에어기타, 안 하면 안되는데 말이다.

아! 정말 에어기타, 마음놓고 할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싶어 고민과 수소문 끝에 지금의 작업실로 이사 왔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에 방음판, 일명 ‘계란판’이 덕지덕지 붙은 밴드 합주실이다. 혹자는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고도 했지만, 고성방가가 허락된다는 이유로 당장 계약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에어기타를 마음 편히 할 수 있게 되었다. 1차, 2차가 끝나고 3차에 우리 작업실로 끌려온 홍대 3인조도 몹시 만족해하면서 찢어지는 사운드에 한바탕 에어기타를 치다가 아침에 해장국 먹고 집에 간다.

요새는 또 다른 목표에 부풀어 있다. 에어기타 마니아를 위한 게임이 등장한 것. 이름하여 ‘기타 히어로즈’라고 기타랑 똑같이 생긴 패드로 플레이하는 것인데… 그야말로 간지나게 에어기타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보면 ‘애들도 아니고 말이지…’ 하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고된 작업의 끝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소주 한잔과 함께 찾아오는 휴가인 셈이다.

얼마 전에 에어기타하는 모습을 캠으로 찍어서 김모 여인에게 보여줬더니 그녀가 하는 말, “미친 놈들….” 그나저나 이게 길티 플레저가 맞는지 아닌지 헷갈리는 건 왜일까?

이경석 만화가. <한겨레> esc 지면에 <좀비의 시간>, 만화잡지 <팝툰>에 <전원교향곡>을 연재했다. 헤비메탈 애호가답게 기타와 록을 다룬 만화 <록커의 향기> <속주패왕전>을 집필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