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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좀 더 붙잡고 망치를 날릴 순 없었나

<나무없는 산>과 <독>을 보며 2%의 진한 아쉬움을 느꼈던 이유

<나무 없는 산>

어떤 영화들을 보면 새삼 영화 만드는 게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훌륭한 재능이 느껴지는데도 새로운 뭔가를 창조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이다. 이는 비단 장르영화를 대할 때 갖는 소회만은 아니다. 예술영화도 그 자체의 범례가 있어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전해지는 것이다. 김소영 감독의 <나무없는 산>이 그랬다. 상당히 인상적인 순간들이 이 영화에는 꽤 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인가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 정도로도 됐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얘기를 하다 만 것 같은 미진함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초반부는 어린 자매가 엄마에게 버림받는 걸로 시작한다. 엄마는 저금통을 자매에게 주고 저금통이 채워지면 돌아올 거라고 하는데 자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뭔가 겁에 질린 듯이 눈망울을 굴리며 많이 무책임한 고모 집에서 학교도 다니지 않고 생활하는 이 아이들을 카메라가 쫓는다. 쫓는다, 라는 말밖에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가엽게 버려진 이 아이들이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보이는 표정을 카메라가 지근거리에서 관찰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느낀 것인데, ‘지켜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이처럼 끈질기게 붙잡고 있으면 관객으로서 어떤 윤리적 책임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뭔가 본다는 것을 꽤 의기양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미지 중심 문명을 사는 처지로서 본다는 것은 곧 권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봤다는 것, 어떤 증거의 느낌, 또는 앎의 성취감이 이 권력적 착시의 배경이다. 사실은 봤다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영화관에서 누군가의 삶을 엿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우리가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해서 그게 대단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이는 종결형으로 끝나는 대다수 대중적 장르영화에서 간혹 우리가 느끼는 역겨움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김소영의 정직하지만 뻣뻣한 연출

<나무없는 산>은 그런 위선적 감동과는 다른 방향에서 주인공 꼬마들의 삶을 관찰한다. 이화정 기자가 지난호에서 쓴 대로, 현미경으로 보는 듯한 초반의 카메라 연출은 후반부로 가면서 조금씩 각이 넓어진다. 그것도 좋다. 이 아이들에게 그만큼이라도 희망을 열어두는 것이라고 이화정 기자가 취재한 감독은 말했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감독이 정직한 태도로 연출한 것은 좋지만 그것도 너무 편의적인 방식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21세기에 만든 영화를 두고 <뉴욕타임스>에서 네오리얼리즘 운운했다는 것도 식상하다. 오픈 엔딩이라는 것은 연출자로서 취할 만한 태도이지만 그게 어떤 범례에 속하게 되면 예술영화의 상투형처럼 보이게 된다. 무례를 범하는 것에 양해를 구하며 굳이 비교하자면 비슷한 소재의 <아무도 모른다>에는 관객의 진을 빠지게 하는 감독의 시선과 의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불우한 운명을 방치한 가족과 사회에 분개하기는 쉽다. 영화가 거기에 편승하면 천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도 모른다>의 후반부는 충분히 불행을 보여줬는데도 지독하게 화면을 끝내지 않는 어떤 불편한 결기가 있었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그들 각자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여유로는 아직 모자란다는 전언이 긴 에필로그에 담겨 있었다. 그로써 관객의 무력감은 지독하게 배가된다고, 적어도 나는 느꼈다.

그에 비하면 <나무없는 산>은 정직하지만 좀 뻣뻣하다. 감독의 예술적 개입은 어차피 극영화의 전제조건이다. 그가 이 영화의 화면 대다수를 아이들의 클로즈업으로 채운 것은 놀라운 감각의 산물이라는 게 증명된다. 이 정도로 섬세한 연출력이라면 더 밀고 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후반부에 할머니 집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과거에 비해 좀더 편안해 보인다. 고모에 비해 할머니, 할아버지가 딱히 더 배려가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비교적 상태가 좋아 보인다. 그들이 이 생활에 적응해서일 수도 있고 시골에서의 삶이 그들의 마음에 안식과 여유를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를 멈춰도 되는 것일까. 또 다른 차원의 고양이나 탈진의 경험이 수반될 수는 없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열린 결말이라는 전제 아래 이 영화도 예술영화의 상투형에 갇힐 위험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이렇게 된 데는 등장인물의 삶의 묘사가 스케치 차원에 머물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공간감각이 입체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따라서 동시대의 삶의 감각도 만연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 꼬마의 주변 삶을 묘사하는 더 많은 숏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사건 위주의 연출로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이 영화는 그 사건들로부터 불필요한 윤색은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다짐을 보여주고 있으나 관객을 자빠트릴 만큼은 안된다. 오늘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예술영화의 전반적인 형편도 잔인한 시장의 농간도 적지 않겠으나 이런 식으로 범례화될 수 있는 창작 스타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극적 감동을 위해 약을 치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공간을, 조금 더 붙잡고 끝내 망치를 날리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김태곤의 재능, 그러나 잃은 것들

전혀 다른 범주의 영화지만 김태곤의 데뷔작 <>에 대해서도 상투형에 관한 또 다른 지적을 할 만 하다. 이 영화를 부산영화제에서 봤을 때 선배 평론가가 충무로에서 원하는 재능을 지닌 감독이라고 평하는 것을 들었다. 김태곤 감독 본인도 <>이 독립영화의 범주로 묶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내게 말했다. 그저 저예산 여건에 맞춰 찍은 상업영화라는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이 영화를 공포영화 코드에 따라 찍었는데 실제로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는 눈뜨고 보기 힘든 장면이 펼쳐진다. 깜짝 놀라게 하는 공포영화의 효과와 점진적으로 숨통을 조이는 듯한 상황이 효과적으로 연출된다. 열악한 제작여건에도 순전히 화면 연출 감각만으로 이런 순간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김태곤의 재능을 증거한다.

그러나 잘된 공포영화의 조건 중 하나인 등장인물의 슬픔을 이해하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해보면, 김태곤이 공포영화 관습을 적당히 따르면서 잃은 것도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의 플롯은 사건의 전말을 덮어둔 채 마지막에 가서야 모든 것을 밝히는 수법을 쓴다. 공포는 대개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게 맞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 반전이 너무 극적이어서 애초에 노린 효과가 반감된다. 이제까지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보던 우리의 초조감에 대한 보상으로는 좀 실망감이 드는 것이다. 더구나 그때까지 보여줬던 아파트에서 사는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집중적 묘사가 주는 감흥을 생각하면 공포의 매개가 된 원인을 뭔가로 환원시키는 것은, 또한 그것으로써 주인공 일가의 죄의식을 해명한다는 것은 과감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장르영화의 인과율이 이 경우에 꼭 그렇게 과다하게 필요했는가, 그에 따라 플롯을 역순으로 배치해 꼴 필요가 있었는가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냥 실제로 우리의 관계가 공포스럽다고 해도 이 영화는 밀고 나갈 부분이 많았다. 다른 것을 만들어내겠다고 하는 것이 거꾸로 상투형에 갇힐 수도 있다는 역설을 이 두편의 영화가 보여준다. 개별적으로 빛나는 부분이 상투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을 덮지 못한다고 해서 이 두 영화의 가치가 바래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쉬워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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