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소설 탓이다. 라만차의 귀족 알론소 키사노는 기사도 문학에 탐닉한 나머지 자신이 읽은 것이 글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는다. 영문 모르는 동네 처녀를 둘시네아라 이름 짓고 열렬히 숭배하더니, 여인숙 주인을 성주라고 우겨 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다. 보다 못한 이웃들이 해악의 근원인 책을 없애지만, 불굴의 기사는 새벽을 틈타 다시 넓은 세상으로 도망친다. 있지도 않는 섬 하나를 주겠노라는 맹세에 넘어간 어수룩한 산초 판자를 시종으로 거느리고.
프랑스의 정치적 격동기를 풍미한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1808~79)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소재로 유화 29점과 드로잉 49점을 그렸다. 1866~68년 사이에 그려진 이 작품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가 집 떠나는 날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탁월한 캐리커처 작가였던 도미에는 디테일을 뭉뚱그리는 재빠르고 소략한 붓질로 인물의 개성을 포착한다. 멀리 환상의 인도를 따르는 깡마른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의 뒤를, 뚱뚱한 현실주의자 산초 판자가 터덜터덜 뒤따른다. 백마 로시난테 위의 돈키호테가 척추를 꼿꼿이 세운 반면, 심드렁하게 등을 웅크린 산초 판자는 당나귀 등에서 끄덕끄덕 조는 기색이다. 어쨌거나 돈키호테가 오연히 치켜든 창은 둘만의 작은 부대를 이끄는 깃발처럼 보인다. 도미에는 여기서 독특하게도 산초를 근경에 놓는 구도를 선택했다. 산초는 누구인가? 그림 속의 남자는 이미 지쳐 보인다. 그는 돈키호테의 드넓은 오지랖과 기행으로 인해 누구보다 깊은 곤경에 처하는 자다. 또한 돈키호테의 ‘무용담’을 알게 된 뭇사람들이 귀향한 그를 잔인한 장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그리하여 돈키호테가 자신의 모든 모험을 부정하고 우울증에 빠졌을 때 기사의 환각을 되살리기 위해 애쓰는 자다. 그는 돈키호테의 광기에 경악하는 동시에 매혹당한다. 독자/관람객이 그러하듯.
도미에는 어째서 <돈키호테> 이야기에 반했을까? 일부 평론가는 풍자화가 도미에가 진지한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싶은 열망을, 기사도적 이상을 추구하는 돈키호테의 모험에 투사했다고 해설하지만, 후련한 설명은 아니다. 돈키호테는 사회가 꿈꾸기를 허용하지 않을 때 그 거대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개인이 윤리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는 문학적 마스코트다. (돈키호테와 산초를 포함한) 도미에의 인물들이 지닌 표정이 마모된 얼굴과 힘이 들어간 근육은, 삭막한 삶의 조건과 지지 않으려는 오기의 마찰을 생생히 드러낸다. 도미에가 즐겨 그린 시민들- 센 강에 아이를 목욕시키는 아버지, 아이 손을 잡고 역풍을 맞으며 걷는 엄마, 멜로드라마에 열광하는 가난한 관객, 저잣거리에서 연희를 펼치는 유랑극단원- 의 초상은, 궁극적으로 돈키호테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어떻게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아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꿈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차린 알론소 키사노는 비참해진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열망했을 때 찾아와 주지 않았던 비극은, 그가 모든 각오를 버리자 불현듯 찾아온다. 모든 허물과 민폐에도 산초는 돈키호테를 사랑했다.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