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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밤의 하모니
김혜리 2009-08-14

제임스 맥닐 휘슬러, <푸른색과 금색의 야상곡: 낡은 배터시 다리> 1872/1873 James McNeill Whistler, <Nocturne : Blue and Gold-Old Battersea Bridge> 1872/1873

밤은 내린다. 아침이나 낮에는 어울리지 않는 동사 ‘내리다’가, 밤을 주어로 삼으면 활짝 날개를 편다. 밤은 사물과 풍경을 덮어, 크리스토의 포장 설치 예술처럼 부드럽고 대범한 덩어리만 남겨놓는다. 채 사라지지 않은 일광의 노란 흔적이 다가오는 밤의 암청색과 마주치면 초록이 감도는 깊은 파랑이 공기 중에 번진다. 강가에서 맞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한층 장중하다. 침착히 가라앉은 물의 청색이 낮게 드리운 하늘의 그것과 만나 거대한 블루의 화음을 이룬다. 우주의 움직임을 상기하게 되는 시각. 어떤 이는 신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비로소 홀로 될 수 있는 평안에 한숨을 내쉬며, 젊은이들은 하루 중 가장 근사한 일이 이제부터 일어나리라는 기대에 설렌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1834~1903)는 강과 어스름을 사랑한 화가였다. 여러 나라를 전전한 휘슬러의 삶 곁에는 미국의 코네티컷 강과 허드슨 강, 러시아의 네바 강 그리고 런던의 템스 강이 언제나 흐르고 있었다. 우아한 취향을 뽐내는 댄디(dandy)였던 휘슬러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호들갑스러운 빨강, 울부짖는 노랑을 탐탁지 않아했다. 대신 그는 색채의 은근한 하모니에 몰두했다. 형태를 단순화하고 따로 놀던 색채를 통합하는 황혼과 밤에 그가 반한 것도 당연하다. 화가는 이렇게 썼다. “빛이 사위어들고 그림자가 깊어지만 사소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자질구레한 모든 것이 퇴장한다. 사물은 위대하고 강력한 덩어리로 보인다. 단추가 보이지 않지만 옷은 남는다. 옷은 보이지 않지만 모델이 남는다. 모델도 보이지 않게 되면 그림자가, 그림자조차 사라지면 마침내 그림이 남는다.”

템스 강변의 저녁을 그린 <푸른색과 금색의 야상곡: 낡은 배터시 다리>는 <야상곡> 시리즈의 대표작이다. 육중한 교각과 상판으로 이루어진 배터시 다리는 화면을 구성한 수평선과 수직선에 대범하게 조응하며 평평해진 해질녘의 시야를 보여주는 동시에 근경과 원경을 갈라 공간감을 표시하고 있다. 전경의 허리를 굽힌 뱃사람의 실루엣은 크기의 대비를 통해 강과 다리의 규모를 드러낸다. 섬세하게 변주된 청록색이 화폭 전체를 압도한 가운데, 강 건너 공장과 창고의 불빛, 어둠으로 녹아들기 직전인 사람과 배의 실루엣이 쐐기처럼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그림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붉은색을 쓴 원경의 미미한 점 하나는 상상 이상의 따뜻한 효과를 풍경 전체에 미치고 있다. 하늘에 덧없이 흩어지는 로켓의 황금빛 자취는 낮과 밤이 교차하는 마술적 시간의 무상함을 노래한다.

생략으로 완성된 교묘한 야상곡. 이 화폭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한 줄기 강물로 흘러가는 풍부한 펼침화음이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