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말이 별로 없구나…난 네가 좋아.”-소녀 엘리가 소년 칼에게 많은 말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는 “좋은 영화는 대개 여행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 장 르누아르는 “영화는 어딘지 강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는 간결하고 힘찬 말들. 픽사의 새 애니메이션 <업>을 말하는 데 더 어떤 말들이 필요할까. 어린 시절 모험을 갈망했던 칼은 70대 노인이 되어 드디어 집을 떠난다. 함께 모험을 꿈꾸었고 아내가 되어 평생을 같이 하다 영면한 엘리가 그에게 남긴 한마디는 “모험을 함께해서 고마워요. 이제 당신 자신의 모험을 떠나요”였고, 그는 그 말을 따른다. 풍선을 가득 단 그의 집은 이제 하늘을 항해하며 70년 전에 꿈꾸었던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한다. <업>은 말 그대로 여행하며 강물처럼 흐르다 굽이치고 맴돌다 강하하며 목적지에 이른다.
말들은 이 영화의 내부에서도 부차적이다. 우리가 만일 대사를 듣지 못한다 해도 이 영화는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아이들 영화여서 그럴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태초에 영화는 하나였다. 그것은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마술과 같은 것이었다. 멜리에스의 판타지만 그러했던 게 아니라, 토마스 엘새서가 관찰한 대로 뤼미에르의 노동자의 걸음걸이와 기차의 도착도 당대의 관객에게 경이로운 마술이었다. 그 마술은 곧 일상적 기술로 인지되었지만, 재현적이라기보다 표현적인 디지털 영상의 자질 덕으로 어쩌면 우리는 20세기 영화를 관류하던 재현의 계율 혹은 재현의 윤리라는 자기 규제부터 풀려나 최초의 관객이 향유하던 ‘움직임’에의 마술적 도취에 오히려 더 가까워질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의 비상장면은 왜 충격적인가
픽사의 전작 <월·E>는 그런 점에서 21세기 초반의 가장 중요한 영화 가운데 한편이 될지도 모른다. 드럼통을 닮은 청소 기계의 30분에 이르는 고단한 몸짓이 왜 그토록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가. 크고 작은 물리적 재난의 끝없는 생산지로서의 세계, 그리고 그 재난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주체의 근면하고 창의적인 동작들, 그 두 움직임이 교차하고 중첩되고 배열되면서 이루어지는 어떤 조화와 리듬. 추상화된 언어가 스며들 틈이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순수한 움직임들의 합주. 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라는 질문을,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향해 한 적이 없듯이, <월·E>를 향해 할 필요가 없다. 거의 한 세기 전의 키튼과 오늘의 ‘월·E’는 세계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감각 기계에 가깝다(사실 ‘월·E’는 그 자체가 기계이므로 인간이었던 키튼의 방식이 더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픽사를 초기 영화의 마술적 매혹을 되살린 21세기의 키튼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업>에도 무성영화적 활력이 약동하지만 <월·E>에 비한다면 주류 영화의 관습적 서사에 가깝다. 칼은 소시민이고 자신의 결단으로 모험을 선택하며 시련을 겪은 뒤에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에는 표면상의 이야기와는 별도로 그래픽의 세계와 포토그래픽 세계의 다중적 관계라는 다소 복잡한 사태가 개입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선 차츰 말하려 한다. 이 영화의 잘 가공된 캐릭터와 세련된 화술, 그리고 재기 넘치는 슬랩스틱의 장면들을 굳이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많은 이들이 격찬한, 칼의 일생을 10여숏의 무성 몽타주로 보여주는 초반 시퀀스에는 감탄을 숨기기 힘들다. 간결하고 고요하며 민첩한 듯 부드러운 이 몽타주 시퀀스는 그러나 이 영화의 정점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퀀스는 몇 장면 뒤에 올 어떤 숏을 위해 예비된 것이다.
엘리와 처음 꿈을 나누었고 그녀와 70여년을 살아온 집을 강제로 떠나야 했을 때, 더구나 고전기 영화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몽타주 시퀀스 다음에 놓인 칼의 선택은 영화를 보기 전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수천개의 풍선을 단 그의 집이 마침내 우주선처럼 지상으로 떠오를 때, 이 황당한 장면에서(그는 언제 풍선을 만들었고 운항 장치를 언제 마련했다는 말인가) 나는 넋을 잃었다. 집을 타고 비상해 모험을 떠나는 것. 집의 안온함을 누리면서 모험의 역동성을 향유하기를 비유가 아니라 직유로 실현하는 것. 혹은 기억의 보존과 미지에의 동경이 집이자 비행선인 하나의 육체를 경유해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것. 현실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이 여행 방식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꿈꿔왔던 것이 아닌가. 그 꿈이 하나의 숏에서 어떤 움직임으로 표현될 때, 우리는 속 깊은 오랜 친구가 나지막한 말투로 “말하지 않았지만, 네가 원하는 걸 알아”라고 말해줄 때와 비슷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월·E> 때와는 달리 이 장면에서 받은 감동은 다소 혼란스럽다. 떠다니는 집의 모티브를 우리는 <오즈의 마법사> 혹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이미 만난 적이 있다. <업>에 영향을 미쳤을 그 두 영화는 그러나 환상담의 방식으로 정제되어 있다. <업>에서 집의 비상장면이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현대적인 건축으로 개발되는 공간 내에 고립된 오래된 집이라는 동시대적이며 사실적인 장면 다음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집의 비상이라는 표현적(혹은 그래픽) 장면의 정서적 효과를 위해 재현적(혹은 포토그래픽) 장면이 편의적으로 활용될 때, 이것이야말로 그래픽 시네마의 자유로움이라고 말하면 되는 걸까.
<업>에는 두 가지 힘의 은밀한 긴장이 있다. 그것의 그래픽한 상향(업) 운동에는 하강의 인력이 작용한다. 예컨대 집의 비상은 헬륨 풍선의 생명이 3일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의해 제한된다. 여기에는 풍선이 고공으로 갈수록 기압이 낮아져 터진다는 사실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물론 개별적인 사실들로 이 영화를 반박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여기선 다만 그래픽한 상향 운동이 어떤 힘들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 힘들은 적란운이 몰고 온 비바람이기도 하고, 개가 운전하는 비행대의 공습이기도 하며, 헬륨 풍선의 자연과학적 속성이기도 하다. 그래픽한 상상력으로 균질화되지 않고, 사실적 요소가 그것의 하위 요소로 등장할 때, 그리고 그것을 보는 우리가 그것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때, <업>은 레브 마노비치가 말한 20세기 동안 주변화되었던(예컨대 아동용 애니메이션 등으로 분류되어) ‘그래픽 시네마의 복권’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자의식적으로 확인하는 영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업>은 <월·E>와는 다르게 20세기의 사진적 재현의 기억에 좀더 많이 의존한다. 칼은 늙고 병들어 죽은 아내 엘리의 사진을 보며 그녀를 추억하고, 그녀가 남긴 기록과 헬멧과 고글을 쓴 자신의 옛 사진을 보며 모종의 기운을 얻는다. 무엇보다 칼의 모험심의 기원에는 어린 시절 그의 모험심을 부추긴 문츠라는 모험가의 기록필름(물론 애니메이션으로 모조된)이 있다. 애니메이션에 사진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없진 않다 해도, <업>만큼 사진과 사진적 영상이 기원적 모티브로 등장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사진적 재현물과 연관된 이 영화의 또 다른 모티브가 노쇠한 육체다. 과거의 어떤 시점에 정박된 사진적 이미지는 현존하는 육체의 노쇠 과정과 맞짝을 이룬다. 칼의 행위는 20세기 관객이 사진적 영화 혹은 사진적 재현에 매혹된 과정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래픽 시네마로 빚어낸 포토그래픽 시네마에의 향수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칼이 허공에 뜬 집을 밧줄로 매고 힘겹게 걸어가는 장면들이야말로 <업>의 가장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르겠다. 모종의 소동으로 집에서 굴러 떨어진 칼은 간신히 집에 연결된 밧줄을 붙들었지만 허공에 뜬 집으로 올라갈 체력이 노쇠한 그에게 없다. 거대한 집은 저토록 가벼운데 칼의 몸은 왜 이토록 무거운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이상한 장면의 하나가 될 것이다. 새털처럼 가벼운 그래픽의 상상력과, 역시 그래픽으로 표현되었다 해도 사실의 세계에 지배되는 무거운 육체의 기묘한 공존.
칼의 몸은 다시 무거워지지 않으리니
흥미로운 점은 칼의 모험이 이룬 성취의 이중성이다. 그는 어린 시절 파라다이스 폭포 위에 집을 짓겠다는 엘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 길을 왔다. 그리고 그 결단의 기원에는 문츠라는 영웅의 모험가 정신이 있었다. 칼은 그 약속과 정신을 모두 준수했다. 그는 70년을 미뤄온 모험을 감행했고, 집은 우여곡절 끝에 파라다이스 폭포 위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감동적이고 충직한 준수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베네수엘라의 삼림에 살던 문츠는 칼을 도둑으로 생각하고 죽이려다 자신이 죽고 만다(칼은 “이런 농담 같은 일이 있나. 내 어릴 적 영웅이 이제 나를 죽이려 하다니”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말하는 개 더그가 하는 죽지 않는 다람쥐에 관한 엉뚱한 농담은 이 영화의 가장 유쾌하고도 기발한 대사이다). 그리고 집은 파라다이스 폭포 위에 사실상 버려진다.
칼은 무언가를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버리고 온 것이다. 버려진 것은 어린 시절 영웅과 그 죽은 아내에의 기억이 새겨진 집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기억은 이 영화에서 모두 사진적인 재현물로 표현된다. 약속과 어떤 정신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모험은 실은 그것의 물질적 기원을 살해하고 추방함으로써 완수된다. 그가 얻은 것은 그 기원의 세계에서 가장 비현실적이고 그래픽한 사물인 비행선이다. 사진적 기억이 새겨진 집을 버리고 그래픽 세계의 비행선 찾기. 그 비행선 안에서 문츠가 거의 늙지 않았듯이 이제 칼의 몸은 다시 무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겠다. <업>은 포토그래픽의 세계에 작별을 고하는 그래픽 시네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