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영화의 비사: 10편의 뮤지컬>
1934~50년 감독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 이반 피리예프 상영시간 958분 음성포맷 DD 2.0 러시아어 자막 영어자막 출시사 프라다재단(10장, 이탈리아)
화질 ★★★ 음질 ★★★ 부록 없음
1930년대 이후 러시아영화는 긴 암흑기에 들어선다. 스탈린 체제가 원한 건 선명한 정치적 노선이 반영된 대중적인 영화였으니, 무성영화작가들이 주도했던 영화예술과 실험은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기치 아래 검열을 뚫고 만들어진 (국책, 선전) 영화들은 필연적으로 영화사의 무관심 속에 차츰 잊혀져갔다. 200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된 러시아 뮤지컬코미디는 그런 분위기를 뒤집는 사건을 연출했다. 러시아연방문화국 등이 제공한 ‘러시아영화의 비사’ 프로그램은 1934년부터 1974년 사이의 영화 18편을 소개했는데, 스크린 위에서 환하게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옛 소련인의 모습은 그 시기 러시아영화와 사회를 재조명하도록 만들었다(참고로 여섯 작품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낙원음악축제’에서 상영된다).
18편 가운데 스탈린 시기의 10편- 러시아뮤지컬을 대표하는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와 이반 피리예프의 영화가 각각 다섯편씩- 을 수록한 DVD 세트가 나왔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의 인연을 끊고 뮤지컬로 전향해 인기를 얻은 알렉산드로프의 영화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슬랩스틱과 뮤지컬의 과감한 결합을 시도한 그는 <즐거운 사람들>의 크레딧에 ‘찰리 채플린, 해롤드 로이드, 버스터 키튼은 이 영화에 안 나옵니다’라는 농담을 넣는가 하면, <서커스>의 한 장면엔 채플린과 닮은 배우를 출연시킨다. 시골 목동이 도시 악단의 리더로 재탄생하는 이야기 <즐거운 사람들>, 흑인 아이를 둔 미국 여자가 소련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는 과정을 그린 <서커스>, 위대한 음악가로 칭송받게 되는 우편배달부 여자의 성공담 <볼가강>에서 막스 형제의 영화가 연상될 정도로 정신나간 코미디를 보여주던 알렉산드로프는 <밝은 길>과 <봄>에 이르러 성숙미를 더한다. 특히 ‘영화 만들기, 영화와 현실의 반영’에 관한 작품인 <봄>은 만년의 걸작이라 부를 만하다.
알렉산드로프의 영화가 ‘자유와 평등, 아마추어 예술에 대한 애정, 계급의식의 타파’ 등을 주제로 체제 찬양에 나서긴 했지만, 그의 지나친 장난기는 영화의 주제를 흐리기 일쑤였다. 그런 점에서 화려하진 않으나 엄격한 노선을 취한 피리예프의 뮤지컬은 대조적이다. 말년에 ‘뮤지컬 장르의 장인’으로까지 평가받은 피리예프는 단아하고 깔끔한 형식의 뮤지컬을 지향했고, 영화의 주요 배경은 ‘집단농장’을 벗어나지 않았다(초기에 ‘형식주의자’로 비판받은 그의 의식적인 행동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뮤지컬이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는 이유는 멜로드라마를 끌어들여 ‘인물간의 엇갈린 관계와 순수한 사람의 순애보’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집단농장에서 벌어지는 <부유한 신부> <트랙터 드라이버> <돼지 치는 여자와 목동> <쿠반의 코사크>는 물론,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전투의식 앙양’의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전쟁이 끝난 날, 저녁 6시에> 같은 작품에서도 피리예프는 민중의 삶에 밀착하는 성향을 고수했다.
1930, 40년대는 할리우드 뮤지컬 장르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적대적이었던 양 체제의 뮤지컬이 공히 ‘결국에는 실패하는 이상향’을 꿈꾸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볼가강>의 노래가사처럼 뮤지컬은 언제나 ‘동화가 현실이 되는 세상’을 노래했지만, 현실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뮤지컬의 슬픔이다. DVD는 ‘러시아영화의 비사’ 프로그램을 지원한 프라다재단에서 직접 제작했다. 1995년에 현대예술의 발전 도모를 목표로 설립된 당 재단이 활동성과를 보여주고자 만든 결과물 중 하나인데, 디지털로 말끔하게 복원된 영상이 멋들어진 패키지에 담겼다. DVD의 성격상 아직까진 개인적인 접근이 힘든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