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의 유신랑이 말했다. “분노가 먼저입니다. 정치가 먼저가 아니라 분노가 먼저입니다.” 왕궁의 사연을 담은 사극드라마에서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보는 건 당연한 거다. 그래도 유신랑의 말에 마음이 크게 동했다. 그의 다음 대사는 더 아찔했다. “분노가 먼저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미실에게 놀아난 것입니다. 미실은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하고, 하여 우리는 분노도, 생각도, 행동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가에게 정치적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다. 상관없다. 의도가 어떻든 정치보다 분노가 먼저라는 대사에 전율하면서 동시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지난 7월22일, 한나라당이 국회를 점거해 미디어법을 통과시키던 그날 하루 종일 문자가 날아왔다. 최근 <씨네21>이 가입한 언론노조에서 보낸 것이다. 국회로 모여달라는 내용이었다. 마감이 코앞이라 간간이 뉴스만 봤다. 야당 당직자들은 물론이고 국회의원들도 국회출입을 저지당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국회 단상 곳곳을 점거했다. 정족수가 부족했지만, 그들은 국회법까지 어기고 야당의원들과 난투극까지 벌인 끝에 재표결했다. 유신랑의 말에 비춘다면 그들은 정치적 수를 (비록 억지스럽다 해도) 행동으로 이어놓은 셈이다.
드라마 속에서 유신랑의 아버지 김서현은 “분노로 무엇을 해결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당연히 해결이 될 게 있을 리 없다. 문제는 정치적인 수만 생각하다가 분노해보지도 못한 채 뒤통수를 맞는 상황이다. 유신랑도 천명공주에게 말한다. “이 땅에는 미실에 맞서 분노할 자가 없습니다.” 분노는 언제나 대중이 먼저 했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수에 따라 뒤이어 분노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 한번쯤은 국회의원들이 먼저 나서서 분노해주면 안되려나. 법과 질서를 생각하고 따져보기 전에 몸이 먼저 동하는 분노 말이다. 의사봉을 뺏으려는 밀고 당기기의 몸싸움이 아니라,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주먹다짐과 발길질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좋을 게 없을 거다. 빈곤한 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고작 할 수 있는 게 촛불을 켜는 일밖에 없는 입장에서는 그런 쇼도 반갑다. 상냥하게 분노하려해도 일단 잡아들이고 보는 정권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