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가 소개하는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다. 1938년의 어느 날 오즈 야스지로의 편집기사 하마무라 요시야수는 더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독 오즈에게 충언했다. “당신의 영화편집 중 ‘시선 매칭’의 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즈의 영화에서 대화를 하는 인물들이 상대방과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카메라의 약간 위를 보고 허공에 대고 혼자 말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장면을 많이 보게 된다. 많은 대중영화가 화면 내 대화 상대자와의 시선의 각도를 180도 가상선 내에 맞춘 다음 혼동이 생기지 않도록 선을 그어주는 것과는 상반된 방식이다. 전자가 오즈의 편집기사가 말한 오즈의 잘못된 편집이고 후자가 그가 제기한 전통적으로 옳은 상식의 편집이었을 것이다. 그의 제언을 들은 오즈는 자신이 늘 써오던 잘못된 시선 매칭과 편집기사가 제안한 옳은 시선 매칭 두 가지 방식 모두 찍어본 다음 결과물을 비교해보자고 결정했다. 그렇게 한 뒤 스크린에서 확인했는데, 그때 그가 남긴 말은 길지 않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별 차이가 없군.”
실은 차이가 많다. 오즈의 이 일화를 두고 영화학자 노엘 버치는 “오즈가 지배적인 서구 재현 양식의 두 가지 기본 원칙에 상징적으로 도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연속성’과 ‘다이제시스 내 견자(viewer)의 포괄’ 문제를 지적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좀더 이론적이고 복잡한 맥락을 갖고 있으니 이 지면에서 다룰 만한 분량은 아닌 것 같고 다만 다른 단상을 말하고 싶다. 오즈가 차이가 훤히 있는 것에 대해 뻔뻔하게도(?) 없다고 말할 때 그건 어떤 차이가 없다는 뜻이었을까. 아마도 오즈의 편집기사와 오즈는 서로 다른 영화의 언어를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차이가 있는 것에 대해 없다고 말하는 오즈의 말을 어떤 쾌감의 환청으로 옮겨 듣고 싶다. 이보게, 영화언어에는 공통의 상식이란 게 있지 않네. 오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가 말한 ‘차이가 없다’는 영화언어에 위계가 없고 다만 창조적 심연에의 깊이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약속 안에서 태어나지 않고 태어난 다음 약속을 호소하는 영화라는 이 요물에 올바른 상식의 언어란 때때로 불청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