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팻은 ‘결혼 생활’을 위해 창안된 커플처럼 보인다. 좋은 직장을 가진 남편과 우아한 아내, 품위있는 저택과 교외의 별장, 일요일이면 손을 잡고 손자를 보러가는 평온한 주말. 이들은 마치 완벽한 결혼 생활의 모범사례인 듯 산다.
<결혼 생활>(Married Life) 속 남편 해리(크리스 쿠퍼)는 보기 드물게 고상한 남자다. 초크 스트라이프 스리피스 슈트에 리넨 포켓치프를 꽂고 셔츠는 언제나 가장 단정한 탭칼라로 고른다. 거실에선 캐시미어 카디건을 입고 침실에서도 실크 잠옷 위에 가운을 꼭 챙겨 입는다. 외출할 땐 밤색 페도라를 쓰고 신사들의 사교 모임인 클럽 라운지에서도 음란한 대화를 꺼내거나 거만한 허풍을 떨지 않는다. 아내 팻(패트리샤 클랙슨)은 고고한 듯 연약하다. 부유층다운 불면증이 있어 호두나무 침대와 학이 그려진 병풍식 액자가 있는 침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대체로 유쾌하고 산뜻한 여자다.
해리와 팻의 결혼 생활은 겉보기에는 안정적이고 성공적이며 타의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러나 깊은 밤 침대에서 남편의 손을 잡는 팻의 손을 해리는 슬그머니 뿌리친다. 팻 역시 남편에게 “주고 또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는 당신의 얘기는 다 헛소리”라면서 부부간의 사랑은 오직 섹스로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리와 팻에게는 각자의 연인이 있다. 해리는 가족 모임을 하면서도 오로지 케이(레이첼 맥애덤스)의 집에서 함께 밤을 보낼 생각뿐이고 팻은 별장으로 정부를 불러들여 쿠키를 먹이고 섹스를 한다.
완벽해 보이는 결혼 생활의 거짓에 지친 해리는 결국 아내의 약병에 불면증 약 대신 독극물을 넣을 계획을 세운다. 어떤 경우에도 고매함을 잃지 않는 이 남자의 살해 명분은 아내에게 ‘축복받은 해방을 주고 싶다’는 것. 마침내 그날 아침, 해리는 공들여 음식을 만들어서 아내의 침대로 가져가고 오늘따라 더 아름답다고 칭찬한다. 독극물 ‘발트라 페닌’을 살 때도, 약병에 독을 부어넣을 때도, 마지막 아침을 위해 토스트에 버터를 바를 때도 해리는 왼손 넷째 손가락에 호화로운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 반지는 크고 빛나고 반짝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