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주말, 야외 공연에 갔다가 말미에 불꽃놀이를 선사받았다. 요란한 폭죽잔치가 아니라 색깔의 조화를 고심한 꽃다발 같은, 여성적인 불꽃이었다. 그날 밤 꿈에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콘서트 팔찌를 풀지 않은 채 잠을 청했다. 불꽃이 작렬할 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멈춘다. 꼬리를 흔들며 솟구치는 불씨의 “피융” 하는 비명에 귀기울인다. 불꽃놀이란 대개 군중에 섞여 보게 되지만 개인의 내밀한 기억으로 애장되곤 한다. 왜일까? 우선 소중한 사람과 함께 구경하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고된 불꽃놀이를 부러 탐탁지 않은 사람과 보러 가는 경우는 없다. 또한, 불꽃놀이는 찰나적이다. 그리하여 우리 의식에 지울 수 없는 점을 찍는다. 불은 적극적인 욕망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사로잡힌 대상을 태워 무화시키는 이율배반적 원소다. 완성의 순간은 곧 수십만개의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이다. 흡사 벚꽃의 미학이다.
불꽃놀이는 색종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일가를 이룬 일본 화가 야마시타 기요시(1922∼71)의 평생에 걸친 탐닉이었다. 같은 소재를 다룬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여기 소개한 그림은 불꽃의 활짝 뻗친 살이 유난히 가늘고, 밤하늘 장관을 올려다보는 구경꾼이 남자 한 사람뿐이라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흰 윗도리에 검은 바지, 귀가 드러난 머리 모양을 한 그림 속 남자는 화가 본인이다. 그림 속 그는 너무 조그마해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붉고 노랗게 만개한 꽃불들은, 수면의 반영과 다정히 쌍을 이루지만 남자는 혼자다. 그날 밤 야마시타는 정녕 혼자였을 수도 있고, 깊이 고독했던 나머지, 혹은 불꽃의 흥취가 도저히 남과 나눌 수 없으리만큼 충만해 사람 무리를 짐짓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야마시타 기요시는 지적 장애가 있었고 세살 무렵 고열을 앓은 다음부터 걸음걸이도 불편했다. 자연, 성장 과정에 이지메가 따랐다. 미술은 그가 유일하게 수를 받은 과목이었고, 수공예나 농원 일로 시간 보내는 것이 낙이었다. 말없는 친구인 꽃과 곤충을 정밀 묘사하는 동안만큼은 사납게 일렁이던 소년의 마음이 잔잔해졌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우표, 포장지, 지폐, 색지 등을 잘게 찢어 붙이는 특유의 기법은 학창 시절 이미 완성됐다. 고흐에게 꿈틀거리는 필적(筆跡)이 있다면 야마시타에겐 손가락으로 일일이 뜯어낸 종잇조각이 있었다. 18살에 방랑을 시작한 야마시타는 밥을 얻어먹고 마을을 떠날 때면 작품을 남기곤 했다. 도시락 뚜껑, 쟁반, 밥주걱, 부채 등등 검소한 서민의 살림살이가 모두 그의 화폭이었다. 1971년 7월10일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올해 불꽃놀이는 어디로 갈까?”였다. 머릿속 혈관이 파열되는 순간에도 그는 불꽃을 보았으리라. 야마시타의 색종이 조각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보면 민들레 꽃잎 같다. 연약하지만 조밀하게 서로에게 몸을 의탁해 단호한 형태를 이룬다. 불꽃놀이를 포착한 사진과 회화는 흔하지만, 야마시타의 ‘하나비’ 연작이 특별한 이유는, 섬광의 이미지를 가장 느리고 고된 작업을 통해 재현하는 역설이 거기에 있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