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마다 ‘스페인병’을 앓는다. 이 병은 유럽여행 중이던 2004년 여름 처음으로 발발했다. ‘스페인 강도는 비닐봉지를 머리에 덮어씌우고 목을 졸라 기절시킨 다음 돈을 뺏는다더라’라는, 지금 생각하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여행객의 말 한마디에 스페인행 열차를 덜컥 취소해버렸더랬다. 한국에 돌아오니 스페인 관련 서적은 왜 그렇게 자주 눈에 띄며, 집시풍의 음악은 또 왜 그렇게 감미로운지. 결정타는 바르셀로나가 배경인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였는데, 후안과 비키가 깊은 밤 근사한 야외정원에서 거리 악단의 연주를 듣는 장면에서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2004년으로 돌아간다 해도 바르셀로나행 기차표를 취소하지 않을지는 미지수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그땐 40도에 육박하는 로마의 폭염에 지쳐 있었고, 그보다 더 뜨겁고 건조하다는 스페인으로 떠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거나 하지 않은 선택을 돌이킬 때마다 스페인을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그리워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 여기와는 다른 곳, 쉽게는 닿을 수 없는 곳,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모습으로 내내 남아 있을 곳.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스페인행 비행기 티켓이라기보다는(있다면야 ‘정말’ 좋겠지만) 이국의 땅에서 비로소 얻게 되는 판타지였던 듯하다.
이처럼 여행보다 판타지가 더 절실한 분들이라면 김병종 작가의 그림을 권한다. 김병종 작가는 역동적인 화면과 강렬한 원색의 사용으로 독특한 화풍을 구축해왔다. 주목할 만한 점은 동양화가인 그가 쿠바와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이국의 모습을 동양화적인 기법으로 그려낸다는 것인데, 동양화 특유의 순박한 스케치가 서양의 강렬한 원색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림과 기행문을 함께 묶어 출판한 <김병종의 라틴 화첩기행> 시리즈에서는 적확하고 섬세한 작가의 그림 코멘트 또한 볼 수 있다. 작가의 따끈따끈한 신작이 궁금하다면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6월21일까지 열리는 <김병종의 길위에서: 황홀전>을 찾으면 된다.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의 형형색색을 한가득 캔버스에 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