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는 조르주 피에르 쇠라(1859~1891)는, 과학자의 업무에 참견한 화가라고만 여겼다. 색 입자를 엄밀하게 병치하고 그 종합은 관람객의 눈에 맡긴다는 신인상파의 광학적 기획은 분명히 치열하고 참신하다. 점묘파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리기’의 과정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까발린 유파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빛이 자아내는 인상과 감흥을 이른바 객관적으로 화석화하는 것. 거기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내 오만을 거꾸러뜨렸다. 셀린(줄리 델피)과 제시(에단 호크)는 저녁의 비엔나 거리를 거닐다 쇠라의 드로잉 전시회 포스터를 발견한다. 포스터의 그림은 <철길>, 그리고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을 위한 습작 중 하나다. 셀린은 언젠가 미술관에서 <철길>을 45분이나 쳐다본 일을 회상하며 예의 총명한 관찰을 들려준다. “이 그림 속에서는 환경이 인물보다 강해 보여. 쇠라가 그린 인간은 언제나 덧없어.” 주변 배경 속으로 녹아 스며드는 모델을 셀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순간, 나도 쇠라의 마법에 홀렸다.
쇠라가 남긴 소묘는 많은 경우, 유화를 위한 습작이다. 쇠라는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이나 <미역감기, 아니에르에서> 같은 야심작을 구성하는 인물 및 요소를 하나씩 분리해 소묘하고 초벌그림을 그렸다. 양산을 든 부인, 강아지, 트롬본 주자, 심지어 호숫가의 잔디밭도 따로따로 떼어내 그린 다음에야 종합했다. 그렇다면 드로잉은 밑그림에 불과해야 지당할 텐데, 아니다. 유화 앞에서 지독히 신중한 쇠라는 종이와 콩테를 잡으면 낭만에 휘둘린다. 색점이 또릿또릿한 유화와 달리 그의 소묘 선은 우단의 표면처럼 결을 형성할 뿐 분별되지 않는다. 무른 콩테 크레용과 짜임새가 불규칙한 미샬레 종이. 쇠라가 애용한 두 재료는 서로를 감싸고 저항하며 최소한의 터치로 형태와 빛의 분포, 분위기를 묘파한다. 거미가 자아낸 실로 짠 베일처럼 고개를 돌리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쇠라의 소묘와 유화는 ‘입자’를 그린다는 목표는 같지만, 상이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쇠라의 집요한 점묘화는 소묘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답을 뭇사람에게 입증하기 위해 짐짓 나열해 보인 풀이과정의 식처럼 보인다.
<에덴 콩세르>의 소재는 도시와 교외의 경계에 사는 가난한 시민들이 하루의 피로를 달래는 술집의 콘서트다. 쇠라답게 인물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가스등 불빛과 그림자, 애소하는 가수의 손은 동등하며 동질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들이 어우러진 부옇고 흐린 화면은 이 공간에 서린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비포 선라이즈>의 집시는 제시와 셀린에게 이런 인사를 남겼다. “잊지 말아요. 수억년 전 별이 폭발해 세상의 모든 걸 만들었어요. 당신도 만물처럼 우주의 먼지로 이루어진 걸 잊지 말아요.” 쇠라의 드로잉은 그 진리의 아름다운 물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