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영화에 대한 최상의 해설자는 물론 감독 자신일 것이다. 작업 방식의 면에서 박찬욱은 굳이 나누자면 로베르토 로셀리니보다 앨프리드 히치콕에 가까운 사람이다. 히치콕과 달리 배우의 즉흥 연기를 존중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는 치밀하게 설계하고 통제하며 장식한다. 현장에서의 창의성을 멈추진 않는다 해도 그는 엄연히 계획과 구축의 예술가이다. “나는 스토리보드 전문가를 고용했고, 숏과 카메라 앵글마다 그릴 것을 요구했다. 나는 스토리보드 구상에 매우 꼼꼼하다. 먼저 머리 속에 영화를 착상하고, 스토리보드를 만든 다음, 촬영 중에는 큰 부분을 수정하지 않는다. 스토리보드의 95% 정도는 영화에 남는다.”(<포지티프> 2008년 5월)
<박쥐>는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몇 마디로 간추리기 힘든 다면체의 영화다. 인터넷에서 보는 관객평의 다수도 이 영화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이 가장 많이 담긴 작품이라고 말했다. 감독 자신의 설명이 궁금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찬욱은 이 영화에 대해 이전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말을 아꼈다. 이 영화에 대해 가진 드문 본격적 인터뷰(‘<박쥐>가 난해하다는 건 정말 인정 못하겠다’, <씨네21> 704호)에서도 주로 최초의 구상에 대해서만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찬반논쟁이 온라인에서도 <씨네21>에서도 벌어졌다.
이 글은 찬반논쟁에서 어느 한편에 서기 위해 씌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박쥐>가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라는 사적으로도 많이 들었던 평범한 질문, 그러나 간명하게 답하기는 어려웠던 질문에 대한 개인적 답변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박찬욱 스스로도 영화의 계획에서 “테마와 이야기가 먼저”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글은 <박쥐>를, 박찬욱이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 “긍정과 부정 사이의 수많은 단계”의 어느 지점에서, 영화 안에서부터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초기의 가능한 해설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상처받은 자한테 복수심만큼 잘 듣는 처방은 없어요. 하지만 복수가 다 이루어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잊고 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걸.” -<올드보이>의 이우진
영화가 시작되면 하얀 병실의 벽 위로 가볍게 움직이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한동안 어른거리고, 이윽고 문이 열리며 신부 상현(송강호)이 들어온다. 이곳은 그의 오랜 친구 효성이 입원한 병실이다. 병실은 앞으로도 상현이 오래 머무르거나 종종 돌아와야 하는 공간이다. 나중에는 자신의 거주 공간마저 병실처럼 하얀 벽과 형광등으로 꾸민다. 병실의 창백하고 차가운 톤은 <박쥐>의 주조(主調)이며, 상현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환유이다. 세상은 병실이며 그들은 모두 어떤 병을 앓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정신병원이 주무대였고 소년 소녀가 주인공이던 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후일담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일단 이 영화를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진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후일담으로 보고 싶다. 아수라와도 같은 복수의 살육을 지켜봐야 했던 아이들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정신병동으로 가야 했다면, 그 복수의 유혈극에서 살아남은 어른들 역시 어떤 병을 얻어 <박쥐>의 병실로 온 것이다. 물론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엮어서 별도의 서사를 꾸미는 건 억지가 되기 쉽지만, <박쥐>에는 그렇게 보고 싶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병실에 입장하는 송강호의 우울한 얼굴과 힘없는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복수는 나의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영화에서 송강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 동진으로 분해 유괴 살해당한 딸의 복수를 하지만 그 스스로도 복수의 대상이 되어 살해당한다. <박쥐>는 마치 ‘그때 동진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시작하는 것 같다. 상처 입은 자가 복수를 이루고 나면 잊고 있던 고통이 찾아온다. 신부(神父)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귀의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처음의 고통에 더해 복수의 과정에서 저지른 죄로 그는 더 큰 고통에 빠질 것이다.
물론 전작들을 통해 추정된 전사(前史) 없이 신부 상현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박쥐>는 그 증상의 원인이 말해지지 않은 채 우울증에 빠진 신부의 이야기다. 자살을 고민하며 고해성사하는 간호사에게 신부 상현은 “자살은 살인보다 더 큰 죄”이며 “우울증 약을 복용하라”고 설득하고 나서 그 스스로 자살과도 다름없는 바이러스의 실험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 우리는 그 무시무시한 결단의 계기를 듣지 못했다. 그 실험이 이루어지는 엠마뉴엘 연구소는 교황청도 인정하지 않은 곳이므로, 그는 지금 신의 말씀에 따른 순교를 감행하려는 게 아니다. 연구소의 흑인 의사는 친절하게도 “기도에 무력감을 느낀 성직자들이 자살의 다른 방법으로 실험 대상을 자처한다”, “심리학적으로 자살과 순교를 구분하기 힘들다”고 그에게(그리고 관객에게) 알려준다. 상현은 그가 신자에게 권한 ‘과학의 은혜’로 치유 불가능한 최악의 우울증 환자다. 그는 지금 자살하려 한다.
그의 자살 충동은 ‘죄의식에로의 도피’(지젝)가 최종적으로 실패했음을 알려주는 증후다. 그런데 그의 죄의식은 무엇일까. 물론 앞에서처럼 전작을 통해 상상으로 재구성할 수 있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상현이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우리가 상상할 수밖에 없는 그 죄의식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바로 그가 죄의식에로 도피했다는 사실 자체다. 괄호 쳐진 모종의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종교적 원조의식을 택한 것이다. 그가 떠안은 종교적 원죄의식은 <올드보이>와 마찬가지로 망각의 기획이며, 영화 초반부에 그가 무기력과 우울을 통제할 수 없어 자살을 택할 때 처음부터 실패한 기획, 일종의 자기 기만으로 드러난다. 즉 <박쥐>는 종교적 구원을 탐구한다기보다 그것의 이미 완료된 실패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무언가 끔찍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것에 대처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한 다음 <박쥐>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 실패는 상현만 드러내는 게 아니다. 고아인 그를 거두어 신부로 키운 노신부야말로 실패자의 표본이다. 그는 상현에게 신의 섭리를 알려준 메신저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이다. 하지만 눈 멀고 걷지 못하는 그는 상현의 유사 자살 선택에 어떤 정신적 감화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상현이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 오히려 그의 피를 수혈받아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한다. 그가 원한 건 감각 기관의 회복이며(“별이 뜬 밤바다를 한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추구한 ‘모든 쾌락’과 동질적인 것이다. 상현은 신을 버린 뒤 아버지를 살해한다. 그들이 속해 있는 신의 섭리로 구성된 상징적 질서는 시작부터 이미 폐허다. 신의 질서와 아버지의 법이 이미 죽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냐가 <박쥐>의 내부에 들어가는 첫 관문일 것이다.
“저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하나이다.” - <박쥐>의 상현
상현은 자신이 이미 “두번 죽었던 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한번은 엠마뉴엘 바이러스를 받은 뒤의 육체적 죽음이다. 다른 한번은? 혹시 <복수는 나의 것>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죽음일까? 이건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선 신부 되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다. 감각적 쾌락을 추방하고 자아중심성을 해체한 신부가 되기 위해선 인간 상현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두 번째의 육체적 죽음 이후에 상현은 뱀파이어가 된다. 리얼리티라는 면에선 극히 황당한 일이지만 여기엔 일종의 시적 논리가 작동한다. 인간 상현이 죽어서 신부 상현이 되었고, 신부 상현이 죽어서 뱀파이어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노신부가 어린 상현에게 가르쳤고 신부가 된 상현이 신자들에게 암송하던 다음의 기도는 자기 예언적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이 기도문은 자아 중심성뿐만 아니라 자기 신체마저 해체되기를 호소한다는 점에서 순결하지만(인간 개별자의 모든 것을 삭제한 다음에야 절대자가 강림한다), 자기모순적이고(신앙을 지탱할 신체기관의 작동이 중지되면 개별적 신앙도 소멸된다), 부재한 신의 불안에 대한 전도된 표현이지만(신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기 전에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 무엇보다 뱀파이어에로의 변태에 대한 예언이다. 인간의 기관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뱀파이어의 육체가 도착할 것이다. 그것이 이 기도의 은밀한 소망이며 바로 상현의 자살의 이유다. 그런데 무엇이 도착한 것일까.
<박쥐>는 뱀파이어 영화의 장르적 계보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는 것 같다. 흡혈귀 영화의 장르적 규칙에 무관심해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십자가 천지인 성당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하고, 입을 대고 흡혈을 해도 그 상대는 뱀파이어가 되지 않는다. 편의적 전용이 <박쥐>의 방식이다. <박쥐>에서 뱀파이어의 피는 이를테면 <마스크>에서 짐 캐리가 쓴 마스크와 유사하다. 그것이 내 육체와 만나는 순간 “나는 통제력을 잃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의 상태가 된다. 그것이 상현이 말한 “모든 쾌락의 갈구”로 드러나며, 지젝의 표현을 빌리면 “내 안에 있는 나 자신보다 더한 어떤 것의 변덕”에 내맡겨진다. 그것은 통제되거나 코드화될 수 없는 욕망 그 자체이며, 그것의 유일한 한계는 내재된 물리적 한계, 즉 끊임없는 피의 공급과 빛의 차단이라는 요구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물리적 요구가 충족되는 한 그 욕망 앞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하지만 최종적 제어장치가 없는 건 아니다. 짐 캐리는 마스크를 끝내 벗어던질 수 있고, 상현은 피의 공급을 중단하고 햇볕을 맞을 수 있다. 마지막 순간에 발휘되는 그 힘을 인간 본연의 선함이나 상현이 끝내 포기하지 못한 사제로서의 윤리로 보는 것도 순진하지만 가능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뱀파이어의 피가 부과하는 ‘향유의 끝없는 반복적 순환에 사로잡힌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자신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그 ‘기괴한 자동장치’의 영원한 작동을 중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의 숙주인 육체를 삭제하는 방법 외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도를 유보시키는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태주라는 여인이다.
“나는 이제 여자도 아니네” - <박쥐>의 태주
여기서 <박쥐>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만난다. 이 19세기 소설의 놀라운 점은 욕망이 금지된 곳에서 비로소 욕망이 작동하는 과정을 징그러울 만큼 생생하게 들려준다는 것이다. 유부녀 테레즈와 총각 로랑의 불타던 정욕은 금지가 사라지자 즉 테레즈의 남편이 두 남녀에 의해 살해당하자, 둘의 욕망도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둘이 다시 결합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죽은 전남편의 유령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 과정은 <박쥐>에 비슷하게 등장한다. 불륜을 벌이던 상현과 태주가 태주의 남편 강우를 살해하자, 그들은 행복해지기는커녕 강우의 유령이 그들의 성적 결합을 끝내 방해한다.
<박쥐>가 <테레즈 라캥>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여인의 위상이다. 소설은 로랑과 테레즈를 동등한 주체로 등장시켜 그들의 개별적 심리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박쥐>에서 태주는 어딘지 애매한 존재다(이 점에서 영화 개봉 전에 출간된 소설 <박쥐>는 오히려 <테레즈 라캥>의 서술 방식과 유사하다). 그녀는 하나의 주체라기보다는 상현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인다. 강우의 피살 이후에 태주의 심리는 거의 묘사되지 않은 채 난데없이 외간 남자 영두와 정사를 벌인 뒤 상현에게 들킨다. 그러다 그녀는 어느 순간 상현을 초과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여 피를 빨 때, 그녀는 상현보다 뱀파이어의 자세에 훨씬 충실하며 그 악마성에서 상현을 압도한다. 물론 이 대목에서도 태주는 상황을 인지하고 반응하는 주체라기보다는 무차별적인 성욕과 식욕의 기계처럼 보인다.
이 애매함은 묘사의 부족이나 과잉이 아니라 그녀의 다른 위치를 말해주는 것 같다. 상현에게 태주는, 그가 노신부를 죽인 다음 혹은 신(神)과 부(父)를 동시에 살해한 다음 새롭게 맞은 신의 위치로서 말이다. 태주는 관능적인 여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이름이다. 그녀는 상현에게 죽은 신을 대체하는 더 큰 신 ‘太主’ 혹은 ‘泰主’이다. 근엄하고 억압적인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무기력한 아버지를 대체하는 이 외설적인 아버지야말로 상현의 나쁜 피를 힘차게 돌게 하는 새로운 신이다. 물론 관객인 우리는 실제로 그런 신 아래 살고 있다. 영화에서 이 새로운 신의 완성은 그의 몸에 엠마뉴엘 바이러스 즉 이브가 뱀파이어의 피와 함께 주입될 때 이루어진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메시아이며 주로 남자이름에 사용되는 엠마뉴엘(히브리어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이 끔찍한 바이러스의 이름으로 붙여진 것, 또 그것이 바이러스와 결합할 때 ‘이브’로 약칭되는 것은 이 존재의 성(姓)과 성(性), 그리고 성(聖)에 걸쳐진 애매성과 복잡성의 암시이다. 흡혈귀의 피와 이브를 주입받고 타락과 쾌락의 신 ‘이브’로 다시 태어난 태주는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 여자도 아니네.”
연인, 딸, 도플갱어, 그리고 그 자신
그런데 사태는 좀더 복잡한 것 같다. 태주는 상현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인상이 곳곳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같이 자랐다는 설명이 있긴 해도, 송강호(상현)와 김옥빈(태주)의 육체적 외양의 차이는 <올드보이>의 성교한 부녀로 나온 최민식과 강혜정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연상시킨다(두 커플의 실제 나이 차이도 같은 20년이다). 맨발로 달리던 태주의 작고 거친 발에 상현이 자신의 큰 신발을 신겨줄 때, 그것은 에로틱하다기보다 부성애의 애틋한 발현처럼 느껴진다. 둘의 과감한 성교가 자극적이라기보다 어딘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 불륜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인상 때문일 것이다. 농담 같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의 딸은 물에서 죽었고, <박쥐>에서 태주는 물침대 위에서 죽음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상한 대사도 있다. <박쥐>의 라 여사는 상현에게 태주에 관해 말할 때 “걔 아버지가 공고 나왔는데…”라고 시작한다. 이 말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형사가 동진(송강호)에게 “재산이 얼마쯤 되시죠?”라고 물었을 때 동진이 “내가 공고를 나와서…”라고 시작하는 뜬금없는 대사를 연상시킨다. 두 영화에 반복되는 뜬금없는 대사는 상현을 태주의 사라진 아버지의 자리로 불러온다. 게다가 태주가 영두를 살해할 때 두 다리로 영두의 허리를 감싸안는 자세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령으로 돌아온 딸이 아버지 송강호의 허리를 안는 기묘하게 에로틱한 자세와 똑같다.
이 점에서 <박쥐>는 <복수는 나의 것>의 기억을 경유한 <올드보이>의 은밀한 변주다. 혹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죽은 부녀가 뱀파이어의 육신으로 돌아와 벌이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악몽 같은 재연이다. 상현과 태주의 이 괴이한 관계의 육체적 확정은 바로 상현이 자신의 피와 바이러스를 함께 태주에게 주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제 두 남녀는 아담과 이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혈연으로 이어진 부녀 관계로 다시 맺어진다. 그러니 “난 이제 여자도 아니네”는 “난 당신의 딸로 다시 태어났네”로 들을 수도 있다. 동시에 그녀는 상현의 자기 안의 타자이자 심연, 즉 자기 안의 괴물의 현신, 혹은 결코 보아서는 안될 그의 도플갱어가 된다. 그러니 그녀는 다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상현은 그녀를 되살렸고 그 순간 동반자살은 예정된 운명이 된다. 이무렵에 <박쥐>의 가장 큰 비극성이 발생한다. 그것은 태주가 상현에게 말한 “당신은 나를 살려도 후회, 죽여도 후회”라는 딜레마의 문제가 아니다.
상현은 태주의 목을 꺾어 죽였다. 그리고 갑자기 허기가 밀려와 그녀의 피를 게걸스럽게 빤다. 끔찍한 살육에 이어진 이 한없이 초라하고 비루한 느낌의 부감숏 다음에, 카메라는 바닥으로 내려와 라 여사가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시선을 알아차리는 상현의 뒷모습을 비춘다. 물론 이때 라 여사는 오직 시선으로만 존재하는 전신마비 환자다. 그 시선을 마주친 다음 상현은 잠시 움찔한 뒤, 태주에게 자신의 피를 주입하기 시작한다. 그는 라 여사의 눈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태주에게 라 여사는 ‘엄마’다. 그리고 상현에게도 그녀는 고픈 배에 라면을 끓여주고 거처를 제공한 어머니다. 그 어머니가 지금 아들(이자 승인되지 않은 사위)이 딸(이자 며느리)를 죽이고 피를 빠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렇게 알아차리고 상현은 마침내 태주를 되살린 뒤 “해피 버스데이”를 명랑하게 외친다. 그런데 상현은 오해했다. 라 여사는 아들 강우를 죽인 두 남녀가 죽기를 사무치게 원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햇볕에 불타오를 때 그녀는 얼마나 기쁜 눈으로 쳐다보았던가. 오인된 어머니, 잘못 전달된 신호가 태주를 되살리게 했고, 이것이 이후의 통제될 수 없는 살육 행각의 시작이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에서도 비극을 진행시키는 건 종종 이런 오인이었다. 비극의 가장 큰 비극성은 종종 그것이 어이없이 사소한 오인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10여구의 시체가 더 전시되고 나서, 상현은 비로소 보류했던 시도, 최종적 자살을 택한다.
물론 상현의 마무리는 인간적으로 깔끔했다. 그는 한국에 시집 온 필리핀 여인을 태주의 손아귀에서 구했고, 태주와 함께 자살지로 이동하는 중에 병자들의 캠프로 가서 한 소녀를 강간하는 시늉을 내고 의도적으로 들킨 뒤 사람들에게 더이상 성자가 아님을 고백했다. 이것은 갑자기 너무 인간적이어서 군더더기처럼 보이지만, 어느 정도 감독의 소망이 반영된 상징적 행위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현이 이웃 한국인들이 다 죽은 곳에서 유일하게 필리핀 여인(이블린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또 다른 이브이거나 이브의 자매다)을 구할 때 한국인의 병적인 집단적 자기동일성에의 욕망을 상기시키고, 풀 죽은 성기를 드러내고 허깨비처럼 그곳을 빠져나올 때 성자와 기적을 도래를 기다리는 무기력한 세속 신앙을 해체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조금 빨아먹고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 경시가 아닐까”- <박쥐>의 상현
약간의 보충을 하려고 한다. 박찬욱의 영화에는 참혹하거나 장중한 사건의 와중에 불쑥 튀어나는 이상한 유머가 있다. 저 유명한 “너나 잘하세요”가 그런 예다. 박찬욱이 불꽃의 영화라고 부른 <올드보이>나 <친절한 금자씨>처럼 비극적 정조에 인물이 충분히 잠겨 있다고 느낄 때 이런 발작적 유머는 일종의 쉼표로 수용되는 듯 하다. 그러나 그가 '얼음의 영화'라고 부른 <복수는 나의 것>이나 비슷한 온도의 <박쥐>에서는 다르다. 5구의 시체를 곳곳에 늘어놓고 상현이 태주에게 “조금 빨아먹고 버리는 건 인명 경시”라고 말할 때, 이 어처구니 없는 대사는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인물에 대한 동일시나 동정적 이해로부터 관객을 격리시켜, 그의 영화가 난해하다는 인상을 갖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박쥐>에는 이런 유머가 넘칠 만큼 즐비하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박찬욱의 의도이다. 그러나 이것을 자기 해체적인 유머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한 것 같다. 김소영은 <박쥐>에 대한 비판적 평론에서 이 영화가 “역할놀이 같다”라는 매우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김봉석은 사석에서 역시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인형극 같다”고 말했는데, 비슷한 뉘앙스로 들린다. 나는 ‘역할놀이’와 ‘인형극’을 중립적인 의미에서 박찬욱 영화의 특징적인 서사 방식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아드리앙 공보의 “박찬욱 영화의 복수에는 행복도 고통도 없고 기술적인 성취만 있을 뿐이다”라는 논평에서 ‘기술적인 성취’라는 표현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신하균)와 동진(송강호)은 복수를 결심하자 바로 범죄 전문가가 되어버린다. 정확이 말하면 전문가처럼 성실하게 행동한다. 그것은 때로 우스꽝스럽고 대체로 엽기적으로 보인다. 그들은 각각 평범한 공장노동자와 기업주였으나 이제 살인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들은 이전의 정체성에 부과되어 내면화한 윤리 때문에 새로운 임무(주로 살인)를 수행할 때 내면적 고통을 겪어야 하겠지만(일반 영화에서라면 양심의 가책이나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한 분열증을 드러내고 관객은 그것을 통해 인물들에 몰입할 것이다),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빠르게 이동해 바로 새로 구성한 주체성 안에서 원활하게 기능하려 한다. 이때 인물들은 ‘역할놀이’ 혹은 ‘인형극’으로 비유되는 바, 새로운 주체성의 임무에 성실하고 무뚝뚝하게 몰두한다. 이것이 인간적 정서적 표현이 아니라 기술적 몰두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이 서사의 방식은 박찬욱의 영화에 담긴 두 가지 전언을 내포한다. 하나는 인물들 자신이 현재 속한 현존 질서의 율법을 내면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쥐>의 상현은 신부 시절에도 신부로 자신의 주체성을 구성하지 않았고 신부의 율법을 내면화하지 않았다. 즉 그는 이 막이 끝나면 바로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는 단역 연극 배우와 같은 태도로 신부라는 주체성을 받아들인다. 즉 그에게 신부는 역할놀이와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부지런히 이동해야 한다. 이때 그 인물에 깊이 잠겨 번뇌하기보다 “당근이죠. 기억력은 그분(하느님)의 장기입니다”라는 썰렁한 유머를 말하게 된다. 박찬욱의 인물들이 드러내는 심드렁함, 혹은 짜증, 혹은 농담과도 같은 궤변은 실은 우울증과 피로의 다른 표현이다. 말로 먹고살던 신부가 하루 아침에 피를 구하기 위해 천지사방으로 날아다녀야 하는 뱀파이어로 살아가려 하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 피로가 그에겐 양심의 가책보다 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그는 “뱀파이어는 식성이나 기호의 문제”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두 번째는 이런 연극성 혹은 기술적 몰두가 직접적인 슬픔과는 어떤 비애감을 전한다는 것이다. 장 피에르 멜빌의 범죄극에서 늙은 범죄자들의 도둑질에 대한 지독한 성실성이 이상하게도 슬픈 느낌을 빚어내는 이유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저토록 성실히 자신의 일(비록 범죄이긴 하지만)에 임하며 심지어 유능한데도, 저들이 그것으로 자신을 지속시키지 못할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세계에서도 이 주체의 자리는 임의적이다. 그 비극성은 주체에게 배정된 자리가 운명적으로 못박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운명적으로 임의적이라는 데 있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무겁게 감각되는 날카로운 소음, 웅성거림, 혹은 중얼거림, 혹은 오인된 소리는 임의적이고 불안정한 주체성의 다른 표현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를 완수한 동진은 다시 냉정한 자수성가형 기업가로 되돌아가려 하지만 살해당한다. 하지만 그가 죽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돌아갈 수 있을까? 즉 이 비극성이 자살과 죽음 혹은 그와 비슷한 완전한 망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소녀는 총알을 토하는 환상을 품지만, <박쥐>의 상현은 피를 토한다. 그는 피와 내장과 살을 토함으로써 비우고, 육체 전체를 자진 삭제한다.
“태주씨를 사랑했지만, 지옥에서 만나요.” - 상현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 태주
망각의 기획에 실패해 우울증 환자가 된 신부가 자살로 쾌락의 화신이 되어 근친상간의 신화를 피의 향연으로 재상연하는 <박쥐>는, 그러므로 <올드보이>이 대한 대안적 영화로 볼 수도 있다. 아버지 살해와 근친상간은 상징적 질서를 부수고 실재와의 끔찍한 대면으로 이끄는 무서운 그러나 획기적 사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외설적인 매체의 속성으로 인해 그 끔찍한 사건마저 스펙터클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외설적 아버지는 이미 오이디푸스의 상연마저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편입시켜, 위반을 공시하지만 실은 그것을 은밀히 권유하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올드보이> 이후에 딸과 성교한 오대수(최민식)의 기괴한 이미지가 왜 그토록 대중화되었을까?
<박쥐>에서, <올드보이>처럼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전체 서사로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상현이라는 인물이 쾌락을 위해 이야기 안으로 불러들여 그것을 액자 구조화할 때, 박찬욱은 그 질문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결국 재상연이 아닐까? 그러니까 무한 변주될 수 있는, 좀더 세련된 외설적 프로그램이 아닐까? 상현은 태주에게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한다. 상현은 태주에게 죽으면 ‘끝’이고 그동안 즐거웠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와 ‘끝’ 중에서 어느 말을 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