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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석의 블랙박스] 영화는 흡혈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가 개봉했을 때 일군의 사람들은 그가 영화의 발명과 유년기에 관하여 낭만적인 방식으로 회고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장면을 예로 들었다. 코폴라는 흡혈귀가 낮에는 힘이 좀 약해질 뿐 돌아다닐 수는 있다는 가정하에 런던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드라큘라의 장면을 만들어 넣었다. 이 장면을 마치 초창기 무성영화의 화면처럼 재현했다. 때를 보면 영화의 탄생을 알린 1895년이다. 도심에서 미나를 만난 드라큘라는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기도 한다. 그리고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은 아니지만, 기차가 들어오는 화면이 그들의 등 뒤로 잡히기도 한다. 브람 스토커의 원작 <드라큘라>에는 전부 없던 내용이다. “이는 다분히 스토커의 소설이 출간된 시점에 태어난 영화 예술에 경의를 보내는 것이었다”고 질 메네갈도는 “공포의 검은 화면”이라는 글에서 쓰고 있다(이 글은 국내 출간된 <드라큘라>(이룸)에 수록되어 있다).

코폴라는 흡혈귀의 존재를 영화의 존재와 겹쳐놓고 생각해본 것인데, 질 메네갈도는 실상 흡혈귀와 영화의 존재에 관해 흥미로운 풀이를 전해준다. 먼저 영화와 마찬가지로 흡혈이라는 행위는 일종의 “에너지를 옮기는 또 다른 이전”이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부활을 원천으로 삼는 건 영화라는 매체 외에는 없다. 다른 이유들도 있다. 흡혈귀가 젊음을 유지시켜주듯이 “영화는 필름에 담긴 인물들에게 영원한 젊음을 간직해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객은 깨어 있음과 수면 사이의 중간 상태에서 밤을 가장한 어둠 속에 위치한다. 말하자면 그를 흡입하는 번쩍이는 화면에 거의 최면적인 지배를 받는다. 그리하여 매혹적이고 양면적인 창조물인 흡혈귀는 그의 활동에 고유한 에너지의 포착과 축적 때문에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 존재로서 이미지 재생의 근대적 기술인 영화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박쥐>에서 바이러스에 걸린 뒤 갑자기 뱀파이어가 된 주인공 상현이 “뱀파이어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걸 듣다가 엉뚱하게도 생각이 옮겨갔고 이런 견해들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기꺼이 오늘도 환영과 환각의 장소로 이끌리듯 들어간다. 영화라는 흡혈귀에게 몸을 맡기듯이.